이미지 확대보기법정에 선 메모리 3사, 담합 집단소송 본격 재판 개시
메모리 3사에 대한 담합 소송 재판이 뉴욕증시를 흔들고 있다. 만약 담합 사실이 사실로 인정되면 반도체 회사들이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D램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를 상대로 제기된 가격 담합 집단소송의 재판 절차가 미국 법원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미국 소비자 집단과 완제품 구매자들을 대리하는 원고 측은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에 낸 소장을 통해, 이들 3사가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전환을 명분 삼아 PC 및 스마트폰용 범용 D램 공급량을 고의로 줄여 시장 가격을 폭등시켰다고 적시했다. 원고 측은 이로 인해 완제품 가격이 동반 상승해 구매자들에게 막대한 초과 지불 피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반독점법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맞서 피고 측인 메모리 3사는 법원에 소송 기각 신청서(Motion to Dismiss)를 제출하고 일제히 법적 반격에 나섰다. 3사는 공급과 가격 변동은 시장 다운사이클 극복과 첨단 공정 전환에 따른 독립적 경영 판단의 결과일 뿐, 경쟁사 간 사전 합의나 인위적 물량 조작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법원이 원고와 피고 양측의 서면 공방을 거쳐 소송 기각 여부를 가리기 위한 첫 심리 절차에 착수하면서, 글로벌 메모리 과점 체제를 둘러싼 치열한 법정 공방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소송의 발단과 전개 과정
이번 소송의 발단은 2024년 하반기부터 2026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범용 D램 가격의 가파른 급등세에 기인한다. 생성형 AI 생태계의 폭발적인 팽창으로 엔비디아 등 가속기 제조사에 납품되는 HBM 수요가 천문학적으로 치솟자, 메모리 3사는 첨단 패키징 라인과 실리콘 관통 전극(TSV) 공정에 제조 역량을 집중 투입했다.
원고 측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특정 소비자용 DDR5 및 서버용 D램 모듈 가격은 누적 기준으로 최대 700%에 달하는 극단적인 상승세를 나타냈다. 스마트폰 제조사 및 개인용 컴퓨터(PC) 조립 유통업체들은 메모리 공급 부족과 원가 상승을 이유로 완제품 출하 가격을 일제히 인상했고, 이는 고스란히 최종 소비자의 부담으로 직결되었다.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법원에 접수된 소장에서 원고 측은 3사가 2022년 말부터 시작된 글로벌 반도체 불황 당시 대규모 감산을 단행한 이후, 업황이 회복되고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국면에서도 범용 D램 라인에 대한 정상적 증설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고 지적했다. 특히 구형 DDR3 및 DDR4의 조기 생산 중단, 고객사 주문량 통제, 첨단 생산 능력의 인위적 HBM 편중 배분을 통해 범용 D램의 품귀를 구조화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는 현지 소송대리인을 선임하고 법원에 공동으로 기각 신청서를 제출하며 맞섰다. 3사는 원고의 주장이 과점 시장의 구조적 특징과 반도체 제조 공학의 특수성을 도외시한 억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미국 법원은 9월 중 양측의 추가 반박 서면을 차례로 접수하고, 10월 본격적인 구두 변론 및 심리 기일을 열어 본안 재판을 계속 진행할지 여부를 판가름할 예정이다.
과거 D램 담합 제재의 뼈아픈 역사
이번 소송이 단순한 민사상 분쟁을 넘어 업계 안팎에 중대한 파장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메모리 3사가 과거에도 유사한 혐의로 미국 사법당국의 처벌을 받은 역사적 전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전 세계 메모리 시장은 치열한 출혈경쟁 끝에 공급 과잉에 직면했다. 당시 D램 가격이 제조 원가 이하로 폭락하자 주요 제조사들은 가격을 지지하기 위해 담합을 도모했다. 미국 법무부(DOJ)는 2002년부터 대대적인 반독점 수사에 착수했고, 수사 결과 1999년부터 2002년 사이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 등의 영업 책임자들이 컴퓨터 제조사에 납품하는 D램 가격을 사전에 협의하고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 사법적 대가는 참혹했다. 미국 법무부는 삼성전자에 3억 달러, 하이닉스에 1억 8,500만 달러의 형사 벌금을 부과했다. 마이크론은 수사 초기에 자진신고(리니언시) 제도를 활용해 형사 처벌을 면했으나, 삼성과 하이닉스의 주요 영업 임원들은 미국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형사 재판 종료 후 이어진 민사 집단소송에서도 메모리 제조사들은 수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합의금을 지급하며 소송을 매듭지어야 했다.
이후 2018년에도 미국의 집단소송 전문 로펌 하강스 버먼은 2016~2017년 D램 슈퍼사이클 당시 가격 폭등을 문제 삼아 3사를 상대로 반독점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법원은 원고 측이 3사 간의 직접적인 담합 합의 증거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최종 기각 판결을 내렸으나, 불과 수년 만에 AI 메모리 전환기라는 새로운 시장 환경을 빌미로 동일한 유형의 사법적 공격이 재개된 것이다.
법정의 핵심 쟁점: ‘불법 공모’인가 ‘의식적 병행행위’인가
미국 반독점법의 근간인 셔먼법(Sherman Act) 제1조는 ‘거래를 제한하는 계약, 결합 또는 공모(Conspiracy)’를 엄격히 금지한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피고 3사의 행위가 불법적인 사법적 공모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시장 상황에 순응한 ‘의식적 병행행위(Conscious Parallelism)’에 불과한가에 집중되어 있다. 과점 시장에서 기업들이 경쟁사의 가격 책정이나 투자 축소를 실시간으로 인지하고 이에 맞추어 각자 유사한 방향으로 경영을 펼치는 행위 자체는 미국 판례법상 위법이 아니다. 따라서 원고 측은 단순한 유사 행위를 넘어 3사 간에 사전 조율이나 상호 묵계가 존재했음을 뒷받침하는 ‘플러스 요인(Plus Factors)’을 법원에 명백히 입증해야만 한다.
원고 측은 우선 인위적인 공급 축소와 라인 전환을 문제 삼고 있다. AI 인프라 확충에 필수적인 HBM이 일반 D램보다 웨이퍼 소모량이 최소 2~3배 이상 많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다. 피고들이 생산 능력을 공격적으로 확충하지 않은 채 기존 범용 D램 라인을 HBM용으로 급격히 전환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시장의 레거시 메모리 공급을 고갈시켰다는 논리다. 아울러 경영진의 분기별 콘퍼런스콜 발표 내용과 공개적인 설비투자 축소 선언, 시장조사업체들의 수급 전망 등을 매개로 상호 간에 감산 기조를 확인하고 보조를 맞추는 ‘공개적 시그널링’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1년 사이 가격이 수백 퍼센트 급등하는 이례적 상황 속에서도 통상적인 경쟁 시장이라면 뒤따라야 할 생산 확대 조치가 3사 모두에서 일제히 배제되었다는 점 역시 담합의 정황으로 지목했다.
메모리 3사는 공학적·물리적 제약의 필연성을 들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원고가 주장하는 공급 제한은 고의적 담합의 산물이 아니라, 반도체 제조 공학의 엄연한 물리적 한계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다. HBM3E 및 HBM4와 같은 최첨단 제품은 다단 적층과 첨단 패키징을 수반하므로 웨이퍼 가공 과정에서 불량률과 수율 손실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동일한 웨이퍼를 투입하더라도 최종 출하되는 칩의 유효 용량이 구조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공학적 사실관계를 방어 논리로 제시했다.
2022~2023년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수요 절벽으로 인해 수조 원대에서 십수조 원대의 천문학적인 영업적자를 기록했던 만큼, 당시 단행된 감산과 설비투자 축소는 파산을 면하고 현금 흐름을 보전하기 위해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내린 경영적 자구책이었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원고 소장에는 3사의 주요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회합을 갖거나 가격 및 생산량을 직접 협의했다는 구체적인 직접 증거가 전무하며, 추정과 정황만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소송 요건의 근본적 흠결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소송의 절차적 흐름과 ‘디스커버리’의 현실적 위협
이번 집단소송은 원고의 소장 제출로 시작되어, 피고인 메모리 3사가 소송 기각 신청서를 접수하면서 초기 공방의 첫 단계를 통과했다. 법원은 양측의 반박 서면 검토와 10월 예정된 심리 절차를 거쳐 기각 신청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법원이 피고 측의 주장을 전면 인용하여 기각 결정을 내린다면, 소송은 본안 심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조기에 완전히 종결된다. 2018년 소송 당시 3사가 거두었던 승리가 바로 이와 같은 기각 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법원이 원고 측 주장에 최소한의 법리적 개연성이 인정된다고 보아 기각 신청을 물리칠 경우, 재판은 곧바로 '디스커버리(Discovery, 증거개시)' 단계로 전환된다. 이는 피고 기업들에 실질적인 사법적 위기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미국 민사소송의 핵심 제도인 디스커버리는 재판에 관련된 모든 내부 문서와 전자우편, 메신저 기록, 회의록, 계약서 등을 상대방에게 투명하게 강제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단계에 진입하는 순간 메모리 3사는 감당하기 힘든 복합적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영업비밀과 핵심 기밀 자료의 광범위한 노출이다. D램의 세부 제조 원가 구조, 설비투자 내부 전략, 공정별 세부 수율, 글로벌 주요 빅테크 고객사들과 체결한 비공개 장기 공급 계약(LTA) 내역 등 대외비 문서들이 고스란히 법정 검토 대상으로 제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천만 건에 달하는 한글 및 영문 문건을 검토·분류하는 데에만 수백억 원 규모의 막대한 법률 비용이 소모되며, 주요 임원들이 장시간 증언 녹취(Deposition)에 불려 나가 사법적 압박을 받게 된다.
더욱 무거운 위협은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이다. 미국 클레이턴법(Clayton Act) 제4조는 반독점법 위반이 인정될 경우 실제 피해액의 정확히 세 배를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글로벌 D램 시장의 거래 규모가 수백조 원대에 달하는 만큼, 본안 심리를 거쳐 배심원 평결에서 패소할 경우 판결금액은 개별 기업의 1년 치 영업이익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규모로 치솟을 수 있다.
이로 인해 디스커버리 과정에서 내부 실무자의 부적절한 메모나 오해를 살 만한 통신 기록이 단 하나라도 발견되면, 피고 기업들은 승소를 장담하기 어려운 배심원 재판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거액의 합의금(Settlement)을 치르고 사건을 종결지어야 하는 뼈아픈 타협을 강요받게 된다. 과거 수많은 글로벌 IT 기업들이 법정 공방의 문턱에서 수억 달러대의 화해를 선택했던 이유가 바로 이 디스커버리 제도의 가혹한 현실에 있었다.
미국 법원에서 개시된 이번 민사 재판은 사법부의 판결에만 머물지 않고, 각국 경쟁 당국의 조사 착수로 비화할 수 있는 강력한 전이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의 전례를 비추어 볼 때, 민사소송의 증거개시 절차에서 기업 간 공모 정황이나 부적절한 정보 교환 흔적이 외부로 흘러나올 경우 미국 법무부(DOJ)나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이를 토대로 직권 수사에 착수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행정 당국의 공식 수사는 민사소송과는 차원이 다른 형사 처벌과 막대한 행정 과징금을 동반한다.
또한 중국과 유럽연합(EU) 등 메모리 수입 의존도가 높은 주요 국가들의 통상 압박 카드로 전용될 위험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실제로 2018년 D램 가격 급등기 당시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SAMR)은 3사의 현지 사무소를 기습 조사하며 반독점 조사를 대대적으로 벌인 바 있다. 중국 정부가 자국 IT 완제품 업계의 원가 절감과 자국 메모리 반도체 육성을 위한 명분으로 이번 미국 소송의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독점 규제의 칼날을 다시 꺼내 들 개연성은 상존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 역시 역내 디지털 전환 비용 증가와 소비자 보호를 내세워 감시 수위를 끌어올릴 수 있다.
과점 체제의 시험대
본격적인 법정 공방에 들어간 메모리 3사 담합 집단소송은, 첨단 과점 시장에서 기업의 정당한 생산 전략과 반독점 규제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막대한 자본적 지출과 극도의 공학적 난이도를 동반하는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서, 경기 변동에 맞춘 설비투자 조절과 수율 한계에 따른 공급 변동은 불가피한 산업적 현실이다. 그러나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소수 기업이 점유하고 있는 구조 속에서는, 개별 기업의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경영 행위조차 언제든 사법적 칼날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이번 소송을 계기로 기술 경쟁력 확보 못지않게 글로벌 규제 환경에 부합하는 철저한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 공급망 조정과 투자 결정이 철저히 독립적인 데이터와 합리적 근거에 입각해 이루어졌음을 투명하게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준비만이 천문학적인 사법 리스크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패다. 시작된 재판의 향방은 향후 글로벌 메모리 공급망의 가격 정책과 기업 간 소통 관행 전반에 걸쳐 중대한 사법적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