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갑보다 더 센 을"이라는 말이 있다. 하청이나 납품업체이면서 그 물건을 사주는 구매업체보다 교섭력이 훨씬 더 큰 업체를 흔히 갑보다 더 무서운 즉 "슈퍼 을"이라고 부른다. 반도체 업계에서 알려진 대표적인 슈퍼을로는 극자외선 노광(Lithography) 장비를 독점하는 네덜란드의 ASML이 꼽힌다. 그러나 반도체 거대 팹(Fab)의 문을 열고 들어가 공정 전체의 메커니즘을 복기해 보면, 반도체 생태계의 진정한 "슈퍼 을 대왕"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주인공이 바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거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pplied Materials)이다 뉴욕증시 상장 티커는 AMAT이다.
ASML이 도화지 위에 빛으로 초미세 회로의 밑그림을 그리는 존재라면, AMAT는 그 도화지 자체를 만들고, 깎고, 화학적·물리적 물질을 입히며, 미세한 표면을 원자 단위로 연마해 마이크로칩이라는 인류 문명의 정수를 실체화하는 기업이다. 웨이퍼 팹 장비(WFE, Wafer Fab Equipment) 시장에서 세계 점유율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AMAT가 없이는 TSMC도, 삼성전자도, SK하이닉스도, 엔비디아의 최첨단 AI 반도체를 단 한 장도 생산해낼 수 없다.
<대체 뭐 하는 기업?>
반도체 제조 공정은 흔히 8대 공정으로 나뉜다. 이 중 웨이퍼 위에 실리콘 회로를 형성하는 전공정(Front-end) 분야에서 AMAT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AMAT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종합 재료공학(Materials Engineering) 솔루션 기업’이다. 단일 장비 분야에 특화된 여타 장비사들과 달리, AMAT는 증착(Deposition), 식각(Etch), 이온 주입(Ion Implantation), 화학기계적 연마(CMP), 계측 및 검사(Metrology & Inspection) 등 반도체 제조 전공정 전반에 걸친 가장 완벽하고 광범위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AMAT의 주요 사업 구조는 크게 세 가지 부문으로 나뉜다.첫째, 반도체 시스템(Semiconductor Systems) 부문은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창출하는 핵심 사업이다. 로직(Logic/Foundry) 및 메모리(DRAM, NAND) 제조에 필수적인 식각, 화학기계연마(CMP), 원자층 및 물리증착(ALD/PVD), 이온주입 장비를 공급한다. 최근에는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구조, 고대역폭메모리(HBM) 및 2.5D/3D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 공정 장비 시장을 강력하게 주도하고 있다.
AMAT의 두번째 사업은 어플라이드 글로벌 서비스(Applied Global Services, AGS)이다. 전 세계 팹에 설치된 자사 장비의 유지보수, 소모성 부품 공급, 공정 최적화 및 공장 자동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서비스 구독(Subscription) 형태의 매출 비중이 높아 반도체 업황의 불황기에도 견조한 수익성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셋째는 디스플레이 및 인접 시장(Display & Adjacent Markets) 부문이다. TV 및 모바일용 OLED, LCD 파판 제조용 증착 장비와 첨단 디스플레이 공정 솔루션을 공급하며 고화질 디스플레이 기술 혁신을 뒷받침한다.
<WFE 빅5>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은 AMAT, ASML, 램리서치(Lam Research), 도쿄일렉트론(TEL), KLA 등 빅5 기업이 과점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AMAT는 전체 웨이퍼 팹 장비(WFE) 시장에서 약 20~24% 내외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수십 년간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는 ‘제왕’이다. VAMAT가 반도체 생태계 내에서 수행하는 핵심 기능과 역할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재료공학 기술의 압도적 독점력이다. 반도체 회로가 2나노미터(nm) 이하의 초미세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단순히 회로를 좁게 그리는 노광 기술만으로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어떤 새로운 원소와 물질을 조합하여 전류 누설을 막고 속도를 높일 것인가"가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AMAT는 금속 배선 공정에 쓰이는 물리적 기상 증착(PVD) 시장에서 글로벌 점유율 80% 이상을 독점하고 있으며, 원자층 증착(ALD) 및 화학적 기상 증착(CVD)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기술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
둘째, GAA와 3D 구조 혁신의 열쇠를 쥐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의 최대 화두인 GAA(Gate-All-Around) 트랜지스터 구조나 NAND의 300단 이상 적층 기술은 AMAT의 장비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AMAT는 증착, 식각, 연마 공정을 단일 시스템 내에서 융합 처리하는 ‘통합 재료 솔루션(IMS, Integrated Material Solutions)’을 통해 파운드리 및 메모리 업체들의 수율 극대화를 이끌어낸다.
셋째, HBM 및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한다. AI 시대의 필수재인 HBM(고대역폭메모리)과 Chiplet(칩렛) 구조 구현을 위해 전공정 장비 기술이 후공정으로 전이되고 있다. AMAT는 2.5D/3D 이종 집적과 웨이퍼 하이브리드 본딩(Hybrid Bonding) 및 TSV(관통전극) 형성 공정 장비를 공급하며, HBM 생태계의 병목 현상을 해결하는 핵심 플레이어로 기능한다.
넷째, 글로벌 반도체 투자의 '시황 선행 지표'이자 표준 제정자다. AMAT는 단순히 장비를 파는 제조사에 그치지 않고 TSMC,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차세대 칩 설계 단계부터 협력한다. AMAT의 실적과 설비투자(CapEx) 가이드라인, 수주 잔고 변화는 전 세계 반도체 경기 흐름과 AI 시장의 향방을 가장 먼저 알리는 청사진이자 시황의 가늠자로 활용된다.
<AMAT 대주주>
AMAT의 소유 구조는 전형적인 미국 대형 첨단기술기업(Big Tech)의 선진화된 지분 분산 형태를 띤다. 창업주 개인이나 특정 일가가 지분을 독점하는 구조가 아니라, 글로벌 거대 기관 투자자들이 주요 주주로 포진해 있다. 최대 주주 그룹은 자산운용사인 뱅가드 그룹(The Vanguard Group)이다. 8~9% 내외의 지분을 보유하여 1대 주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블랙록(BlackRock)이 약 7~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주요 기관 투자자로는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 Corporation), 피델리티(Fidelity/FMR LLC) 등 글로벌 굴지의 자산운용사들이 상위 주주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기관 투자자의 지분율이 80% 이상에 달한다. 전문경영인 체제와 이사회의 철저한 견제 및 균형을 통해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투명한 경영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실리콘밸리가 형성되던 극초기 시절 대부분의 전자 기업들은 완성된 부품이나 회로 자체에 집중하였다. AMAT의 설립자들은 "반도체 산업의 본질은 결국 재료(Materials)의 물리적·화학적 성질을 공학적으로 응용(Applied)하는 데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 '재료공학의 실용적 응용'을 표방하며 지어진 이름이 바로 Applied Materials(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다. 이는 단순히 장비를 만드는 기계 회사가 아니라, 물질의 상태 변화를 다루는 첨단 재료 과학 기업임을 선언한 직관적인 명칭이다.
<1967년 산타클라라>
1967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의 한 작은 가고성 건물에서 AMAT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28세의 젊은 엔지니어였던 마이클 맥닐리(Michael A. McNeilly)는 동료 4명(존 기포드, 프랭크 조민, 데니스 라이스터, 로버트 윌퀴스트)과 함께 창업을 결의하였다. 창업 자금은 마이클 맥닐리가 그의 장인에게서 빌린 단돈 7,500달러가 전부였다. 그들은 당시 태동기였던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화학 기상 증착(CVD) 에피텍셜(Epitaxial) 원자로 장비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반도체 재료 장비라는 미지의 시장에 던져졌다.
마이클 맥닐리는 실리콘밸리 1세대 벤처가이자 탁월한 야망을 지닌 비전가였다. 맥닐리는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이 단순한 모듈 조립이 아닌, 웨이퍼 단에서의 화학 및 재료 제어 기술로 전환될 것임을 명확히 예견하였다. 맥닐리의 지휘 아래 AMAT는 초기 CVD 장비 개발에 성공하며 빠르게 성장하였다. 창업 불과 5년 만인 1972년 나스닥(NASDAQ)에 성공적으로 상장하였다. 1970년대 초반, 맥닐리는 실리콘 웨이퍼 자체 생산, 신소재 개발, 기타 주변 사업 등 지나치게 급격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였다. 때마침 찾아온 1970년대 중반의 1차 석유 파동과 반도체 불황이 맞물리면서 AMAT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와 파산 직전의 절망적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구원 투수 제임스 모건>
1976년, 파산의 낭떠러지에 서 있던 AMAT 이사회는 승부수를 던졌다. 텍스트론(Textron) 등에서 풍부한 경영 경험을 쌓고 벤처캐피털리스트로 활동하던 38세의 제임스 모건(James C. Morgan)을 새로운 CEO로 전격 영입한 것이다.제임스 모건이 1 2003년까지 27년간 집권하며 단행한 경영 대혁신은 세 가지 핵심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사업 구조의 과감한 대수술이다. 모건은 취임 즉시 회사를 도륙할 기세로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였다. 실리콘 웨이퍼 제조 등 적자를 내던 자회사를 매각하고, 오직 ‘반도체 전공정 핵심 장비 개발’이라는 본업에 모든 역량을 집결시켰다.둘째, 글로벌화의 선제적 추진이다. 모건은 미국 장비 업체 역사상 가장 먼저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을 파악하였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일본 반도체 신화가 불어닥쳤을 때, 대다수 미국 기업들이 배척의 태도를 취했던 것과 달리 모건은 1979년 미국 반도체 장비 기업 최초로 일본 현지 법인(Applied Materials Japan)을 설립하였다. 이 판단은 후일 한국, 대만, 중국 등 아시아 반도체 거점 확장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셋째, 불황기에도 멈추지 않는 지속적인 R&D 투자다. 반도체 사이클의 대폭락기가 찾아올 때마다 경쟁사들이 연구개발 인력을 감원하고 투자를 줄였던 반면, 모건은 "불황일수록 기술 격차를 벌려야 한다"는 신념 아래 매출의 일정 비율을 반드시 R&D에 재투자하도록 강제하였다. 이 시기 확보된 초격차 기술력은 업황 반등 시 AMAT가 시장 점유율을 싹쓸이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모건이 CEO로 부임할 당시 연간 약 4,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AMAT의 매출은, 그가 물러난 2000년대 초반 1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거대 공룡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회사를 파산 위기에서 구출해 전 세계 장비 시장 1위로 등극시킨 제임스 모건의 27년 리더십은 실리콘밸리 경영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문경영인 신화로 기록되어 있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는 단순히 쇠붙이를 깎아 장비를 조립하는 회사가 아니다. 원자 단위의 물리적·화학적 재료공학 매커니즘을 제어함으로써 인류의 첨단 반도체 지형을 확장해 나가는 ‘기술 생태계의 절대자’다.마이클 맥닐리의 과감했던 7,500달러 창업 정신에서 출발하여, 제임스 모건의 27년에 걸친 철혈 경영을 통해 완성된 AMAT의 독점적 위상은 21세기 AI 혁명의 시대를 맞아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노광 장비의 ASML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왕관이라면, 그 왕관이 올려진 거대한 왕좌와 왕국 전체를 건설한 주역은 다름 아닌 'WFE의 대왕' AMAT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