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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마음산책 (331)] 과공비례…90도 인사와 한국의 권위주의

G7 정상회의 등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친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18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G7 정상회의 등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친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18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정치권에서 이른바 ‘폴더 인사’가 다시 화제가 되었다.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대통령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여당 대표인 정청래 의원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었다. 당청 갈등설이 불거진 뒤 나온 장면이어서 이를 두고 예의인지, 정치적 제스처인지, 권력 앞의 과잉 충성인지 여러 해석이 뒤따랐다.
그런데 이 장면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2024년 1월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던 한동훈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갈등설이 커진 직후, 충남 서천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 대통령을 향해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이후 대통령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는 장면도, 당시 여당 비대위원장이 대통령에게 90도로 인사하는 장면도 겉으로는 예의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이 장면을 그냥 예의로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몸짓 안에 한국 정치문화의 오래된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는 정치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 권력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습관, 곧 권위주의 문화의 잔재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권위’라는 말을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권위는 본래 나쁜 말이 아니다. 권위를 뜻하는 영어 ‘authority’는 라틴어 ‘auctoritas’에서 왔다. 이 말은 ‘auctor’, 곧 ‘저자’ ‘창시자’ ‘세우는 사람’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증가시키다’ ‘자라게 하다’ ‘풍성하게 하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augere’와도 연결된다. 이 어원을 따라가 보면 권위란 단순히 남을 누르는 힘이 아니다. 권위는 무엇인가를 세우고, 자라게 하고,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며, 사람의 삶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힘이다.
참된 권위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 참된 권위는 사람을 세운다. 부모의 권위는 자녀를 억누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있다. 교사의 권위는 학생을 침묵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있다. 지도자의 권위도 마찬가지다. 지도자는 사람들을 자기 앞에 엎드리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 있게 서도록 돕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영어의 두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authoritative’와 ‘authoritarian’이다. 두 단어는 모두 ‘authority’와 관련되어 있지만 뜻은 크게 다르다. ‘authoritative’는 ‘권위 있는’ ‘신뢰할 만한’ ‘전문성과 정당성을 갖춘’이라는 뜻에 가깝다. 어떤 사람이 ‘authoritative’하다는 것은 그의 말과 판단이 신중하고, 지식과 경험에 근거하며,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준다는 뜻이다. 이런 권위는 강요하지 않아도 인정된다.

반면 ‘authoritarian’은 ‘권위주의적인’이라는 뜻이다. 이는 권위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거나, 권력을 한 사람 또는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권력은 지위나 신분에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대통령에게 허리를 지나칠 만큼 숙여 공손히 인사하는 것은 그가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 지위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권위 있는’ 지도자는 설명하고 설득한다.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는 지시하고 복종을 요구한다. ‘권위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경계와 이유를 함께 제시한다. ‘권위주의적인’ 부모는 “내 말이 곧 법”이라고 말한다. ‘권위 있는’ 조직은 구성원의 판단력을 키운다. 반면에 ‘권위주의적인’ 조직은 구성원의 눈치만 키운다.
한국 사회의 어려움은 권위를 세우는 일에는 서툴고, 권위주의를 재생산하는 일에는 익숙하다는 데 있다. 윗사람 앞에서는 지나치게 낮아지고, 아랫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높아진다. 권력자 앞에서는 침묵하고, 약자 앞에서는 큰소리친다. 대통령, 장관, 회장, 총장, 교수, 상사, 선배라는 이름 앞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사람 자체보다 지위를 먼저 본다. 그러다 보니 관계는 인격과 책임의 만남이 아니라 위계와 눈치의 거래가 된다.

정치권의 ‘90도 인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사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예의는 공동체를 부드럽게 만든다. 동양 문화에서 허리를 숙이는 인사는 상대를 존중하는 품위 있는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에서 공적 인사는 군신(君臣) 관계의 재현이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 대통령과 집권당 비대위원장,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의 관계는 모두 공적 책임을 나누는 관계다. 그들은 상하 관계의 신하와 군주가 아니라 국민에게 위임받은 서로 다른 역할의 수행자들이다.

문제는 공손함이 아니다. 문제는 공손이 지나친, 즉 과공(過恭)이다. 공손함은 상대를 존중하지만, 과공은 자신을 지운다. 공손함은 관계를 부드럽게 하지만, 과공은 권력의 위계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공손함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지만, 과공은 민주주의를 봉건적 장면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므로 정치 지도자의 90도 인사가 논란이 되는 것은 단순한 몸짓 때문이 아니다. 그 몸짓이 “나는 당신보다 아래에 있습니다”라는 정치적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몸짓은 예의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에게 불편함을 준다. 만약 다른 사람이 보이는 지나치게 공손한 몸짓을 즐긴다면 그 사람 자체가 권위주의적인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도 있다.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여당 대표도 대통령의 신하가 아니다. 야당 지도자도 대통령에게 충성을 증명해야 할 사람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공직자이고, 정당 대표와 국회의원도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공적 책임자다. 이들 사이에는 예의가 필요하지만, 굴종은 필요하지 않다. 협력은 필요하지만, 맹종은 필요하지 않다. 존중은 필요하지만, 과잉 충성의 몸짓은 필요하지 않다.
정치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허리를 굽히는 기술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도 자신을 향한 과도한 찬사가 아니라 때로는 불편한 말을 들을 수 있는 넓이이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두가 정렬되는 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나누고, 견제하고, 설명하게 만들고, 책임지게 하는 제도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권위는 복종의 양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권위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침묵시켰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책임 있는 시민으로 세웠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도 있다. 학교에도 있다. 회사에도 있다. 종교 기관에도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에게, 종교 지도자가 신도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 자주 같은 질문이 생긴다. 그래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나는 지금 이 사람을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숙이게 하고 있는가.” “나는 이 사람의 판단력을 키우고 있는가, 아니면 내 눈치를 보게 만들고 있는가.” “나는 책임 있는 성숙을 돕고 있는가, 아니면 의존과 침묵을 강화하고 있는가”를 수시로 물어야 한다.

권위가 사라진 사회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권위주의가 강한 사회는 숨이 막힌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의 해체가 아니라 권위의 회복이다. 다만 그 권위는 과거식 권위주의가 아니어야 한다. 지위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책임에서 나오는 권위, 명령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오는 권위, 사람을 낮추는 권위가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권위여야 한다.

정청래 대표의 90도 인사와 한동훈 의원의 90도 인사는 정치적 맥락도 다르고 당사자의 의도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두 장면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있다. 한국 정치에는 아직도 권력 앞에서 몸을 낮추어 관계를 수습하려는 오래된 문화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때로 처세로 불리고, 예의로 포장되며, 현실 정치의 기술로 이해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성숙하려면 이런 몸짓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권력 앞에서도 공적 책임자로 서는 자세다.

권위는 필요하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위험하다. 권위는 공동체를 세우지만, 권위주의는 공동체의 영혼을 약하게 만든다. 권위는 사람을 자라게 하지만, 권위주의는 사람을 작아지게 만든다. 성숙한 사회는 윗사람이 더 크게 보이는 사회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허리를 펴고 설 수 있는 사회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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