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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장 시원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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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시원한 여름 / 백승훈 시인
바야흐로 본격적인 여름이다. 일찍 찾아든 무더위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꽃들이 철을 잊지 않고 피어난다는 점이다. 주택가 골목길로 들어서면 담장을 타고 오른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가로변의 화단엔 왕원추리꽃·비비추·접시꽃도 피어나 나를 반긴다. 태양의 열기에 지레 겁을 먹고 아침부터 에어컨을 틀어대는 사람들과 달리 식물들은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저버리지 않고 때맞춰 꽃을 피운다.
올여름이 아무리 뜨거워도 남은 생애 중에선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란 말처럼 더위는 갈수록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길고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까이에 숲이 있어 다행이지 싶다. 해만 뜨면 후끈한 열기가 느껴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는 까닭에 나는 새벽 산책을 즐긴다. 희붐한 새벽을 밟아 고요한 숲길을 걸으면 새로운 날을 온전히 선물 받은 기분이 든다. 벌레들도 채 깨어나지 않은 신선한 새벽을 홀로 만끽하는 기분은 새벽 숲길을 걷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걷다 보면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 때 이슬 머금은 꽃을 발견하는 기쁨은 얼마나 짜릿한지….

며칠 전 새벽 숲길을 걷다가 문득 백운대 해돋이가 보고 싶어졌다. 막 떠오른 해가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은빛 햇살을 부챗살처럼 펼치던 순간이었다. 집 가까이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산이 북한산이긴 해도 더운 여름철엔 마음 내기가 쉽지 않다. 백운대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려면 늦어도 해 뜨기 두 시간 전엔 산행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름엔 일찍 해가 뜨다 보니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일출 순간을 놓치기 쉽다. 일출을 보기 위해 북한산을 오르던 날, 헤드랜턴을 머리에 착용하고 어둠을 밟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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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 입구 백운 탐방센터에서 하루재에 이르는 길은 온전히 혼자 걷는 신독(愼獨)의 길이다. 낮의 번잡함을 피해 삼라만상이 침묵하는 고요 속을 나의 숨소리와 발소리만을 벗 삼아 걸으며 나를 성찰하는 시간은 밤 산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다. 숲 저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밤 쑥꾹새가 울고 한낮의 후끈한 열기와 달리 서늘한 밤공기가 주는 상쾌함도 잠시,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등이 땀에 젖었다. 지친 다리를 쉬며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떠 있다. 백운봉 암문에 다다랐을 땐 희붐한 새벽빛이 누리에 퍼지고, 하나둘 등산객들도 눈에 띈다. 새벽빛이 닿은 인수봉이 온통 홍조를 띠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는 백운대 정상에서 떠오른 해를 맞는다. 산을 오르느라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온통 붉게 물든 하늘에 떠오른 태양의 금빛 햇살이 온몸을 어루만진다. 운무에 싸인 산들의 실루엣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언제부턴가 산을 오를 때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산을 오를 수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는 버릇이 생겼다. 유한한 목숨이니 언젠가는 끝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산을 오르는 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정상을 향해 떼어 놓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의미 있고 새로울 수밖에 없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이 계속되는 게 인생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은 늘 처음이어서 낯설고 새롭다. 처음이라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가슴이 설렌다.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아침 해의 기운을 가슴에 담았다. 내 남은 시간 중에 가장 젊은 날 맞이한 백운대 일출의 감동은 오래도록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가장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은 처음 맞이하는 계절처럼 설렘과 호기심을 잃지 않고 계절의 중심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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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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