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미지 확대보기자본시장은 보이지 않는 정치적 불확실성을 가장 냉정하고 정량적인 수치로 가격에 반영한다. 그 핵심 도구가 바로 가중평균자본비용(WACC)이다. WACC는 기업이 사업을 하기 위해 주주와 채권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자본 조달 비용의 성적표다. 미래 현금흐름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질수록 투자자는 더 높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하게 되고, WACC가 상승하면 미래에 벌어들일 돈의 현재가치(PV)는 급격히 감소한다.
최근 한국 수소 기업들이 겪고 있는 만성적 저평가, 이른바 ‘안보 디스카운트’의 본질은 기술력의 부재가 아니라 정치 리스크가 유발한 자본비용 상승에 있다.
동일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글로벌 수소 인프라 기업들이 국가별 정책 안정성 차이에 따라 어떤 재무적 영향을 받는지 살펴보면 그 실상이 보다 분명해진다.
자본시장은 장기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중요한 투자 판단 요소로 반영한다. 법률과 제도를 통해 장기 지원체계를 구축한 국가에서는 투자자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반면, 정책 변경 가능성이 크다고 인식되는 시장에서는 더 높은 자본비용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일본과 중국의 주요 수소 프로젝트들은 장기 정책 신뢰를 바탕으로 비교적 낮은 금융비용으로 대규모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조달하며 기가와트(GW)급 설비 확충에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 수소 기업들은 정권 교체기마다 로드맵과 제도 운영 방향의 변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인식 속에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자본시장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위험 요인으로 평가하며, 결과적으로 국내 수소 기업들은 해외 경쟁사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자본조달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 경쟁사들이 장기 정책 신용을 담보로 저리 자금을 조달해 호주·중동 공급망을 선점할 때, 한국 기업들은 정책 변동성 자체를 비용으로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장기간에 걸친 인프라 사업에서는 이러한 할인율 차이만으로도 프로젝트의 순현재가치(NPV)가 크게 감소할 수 있으며, 투자 결정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구조적 불리함은 국내 주요 선도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에도 일정 부분 반영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발전용 연료전지 기술을 보유하고 AI 데이터센터 분산전원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두산퓨얼셀은 성장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시장의 정책 불확실성 영향을 받고 있다.
최근 CHPS 입찰 일정 재정비 과정에서 나타난 시장의 우려는 단기 매출 가시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고, 이는 기업 가치 평가에도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블룸에너지가 IRA(인플레이션감축법)를 통한 최소 10년간의 장기 세액공제 혜택과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확대를 배경으로 명확한 미래 수익성을 증명하며 시장의 재평가를 받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효성중공업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독일 린데와 협력해 세계적 수준의 액화수소 인프라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시장은 수소 부문의 미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공지능 산업 성장에 따른 전력설비 수요 증가로 본업의 가치가 부각되는 반면, 수소 사업은 정책 지원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독보적인 수소 전소 내연기관 기술로 세계 시장의 주목을 받은 HD현대인프라코어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수소 상용차 보급과 충전 인프라 확산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을 기업이 상당 부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형성과 정책 신뢰의 문제인 셈이다.
결국 글로벌 수소 기업들의 밸류에이션 차이는 단순한 기술 경쟁력의 격차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정책의 예측 가능성과 정부 거버넌스에 대한 신뢰 수준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시장은 냉정하다. 정책의 연속성이 흔들리는 순간, 그 비용은 결국 기업의 자본조달 비용 상승이라는 형태로 되돌아온다.
한국 수소 기업들이 겪고 있는 ‘WACC의 저주’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보조금 규모를 늘리는 것보다 정책의 지속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다. 수소 산업의 경쟁력은 기술 혁신뿐 아니라 정책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 위에서 결정된다. 결국 수소 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시장에 보내는 신뢰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