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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에너지 흐름을 디자인하라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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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국제정치학 박사)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석유라는 자원을 물리적으로 점령하려 했던 '자원 전쟁'의 전형이었다. 최근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통제 시도와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봉쇄 전략은 에너지가 흐르는 길을 누가 쥐느냐가 국가의 생존뿐만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의 전격 체포와 압송, 그리고 그린란드를 향한 미국의 매입 의사 타진까지, 이 모든 사건을 관통하는 건 글로벌 패권을 둘러싼 미·중 경쟁의 격전이 에너지 흐름의 장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자원 전쟁이 유전(油田)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에너지가 생산되어 소비지까지 이르는 경로(Route)와 그 전 과정을 누가 설계하고 통제하느냐를 두고 벌이는 ‘흐름의 통제권 확보 전쟁’이다.

우리는 반드시 ‘설계국가(Design State)’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설계 국가는 무얼까? 지금까지 우리는 에너지 안보를 ‘얼마나 많은 연료를 싸게 사오는가’라는 정적인 ‘비축(Stock)’의 관점에서만 바라봤다.
하지만 설계국가는 에너지를 단순히 창고에 쌓아두는 자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흐름(Flow)’으로 정의한다. 즉, 자원의 공급망과 수송로,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규범을 자국에 유리하게 '디자인'하는 국가를 말한다.

에너지 사학자 대니얼 예긴은 오늘날의 정세를 ‘신(新) 에너지 지도’의 출현으로 정의했다. 이제 안보는 자원을 많이 가진 것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에너지 안보는 기술과 외교, 국제 규범이 결합된 다차원적 과제들이다.

첫째, AI 시대는 유례없는 ‘전력수요 대폭발’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거대 AI 모델 가동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며, 이는 곧 국가의 디지털 경쟁력이 에너지 경쟁력과 직결됨을 의미한다.

둘째, 에너지의 ‘지능적 무기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과거 호르무즈 해협의 물리적 봉쇄가 위협이었다면, 이제는 에너지 망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나 AI를 활용한 공급망 교란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 에너지 안보 지수(NESI)는 2026년 기준 약 59점으로, 통제 역량(75점)에 비해 경로 안보(45점)가 현저히 낮다.
셋째, AI를 활용해 위험을 예측하고 우회 경로를 확보하는 설계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패권 경쟁의 파고 속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하는 설계국가가 되기 위한 3대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물리적 거점을 지능화하고 국가 에너지 게이트웨이를 재설계해야 한다.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주요 항만들을 수소, 암모니아, 희토류까지 아우르는 ‘복합 에너지 터미널’로 전환해야 한다.
여기에 AI 기반의 자율운항과 물류 최적화 시스템을 도입하여 북극항로(NSR)와 같은 차세대 루트와의 연결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는 특정 해협에 편중된 경로 의존성을 타파하여, 국가 전체의 경로 안보 점수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둘째, 기술을 통한 지능형 통제권을 확보하고, 자원 순환형 ‘폐루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공급망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은 기술에서 나온다. 국내 제조 기반을 활용해 핵심 광물을 재활용하는 ‘폐루프(Closed-loop) 흐름’을 국가 표준화해야 한다. AI는 이 복잡한 재처리 과정의 효율을 실시간으로 관리하여 자원 자립도를 높인다. 이는 자원을 외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내부에서 순환시켜, 특정 국가의 자원 무기화에 대응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

셋째, 소프트웨어와 규범을 설계하고, 지능형 그리드와 기술 외교를 통합해야 한다. 에너지 고속도로(HVDC, 수소 파이프라인) 위에 AI 실시간 최적화 소프트웨어를 얹어 지능형 그리드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기술 외교’를 통해 국제 규범을 주도해야 한다. 한국의 선진적인 지능형 에너지 모델을 하나의 이니셔티브로 브랜드화하여, 아시아의 수소 및 희토류 거래 표준을 우리가 선제적으로 제안하고 이끌어 가야 한다.

에너지는 운명이 아니라 설계다. AI 시대의 에너지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데이터'와 '지능'이 결합된 고차원의 자산이다. 미·중 경쟁의 파고 속에서 대한민국은 직접 에너지를 지능적으로 설계하고, 그 흐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질서를 설계하고 제어하는 국가로 거듭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에너지 주권을 쥘 수 있다. 설계하는 자만이 미래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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