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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올가을엔

백승훈 시인

기사입력 : 2023-08-3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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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여름내 수돗가에서 그윽한 향기를 풀어놓던 치자꽃이 시들면서 더위도 한풀 꺾인 듯하다. 일찍이 ‘양화소록’을 쓴 강희안은 치자에겐 네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꽃 색깔이 희고 윤택한 꽃과 맑고 부드러운 향기,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잎과 노란색을 물들이는 열매를 지닌 치자를 귀하게 여겼다.

치자나무는 꼭두서닛과에 속하는 상록 관목으로 중국이 원산지다. 치자꽃의 우윳빛 흰색의 꽃잎이 점점 노랗게 색이 변하며 시드는 사이 하늘은 한 뼘이나 높아져 있다. 어느새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는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아직 가을을 입 밖에 내긴 이른 감도 없지 않으나 청명한 하늘을 따라 아득해 보이던 먼 산이 성큼 다가와 말을 걸어올 때면 나도 모르게 가을을 입속에 넣고 혀를 굴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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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엔 시내 모처에서 ‘마음에 꽃을 심다’ 작은 북 콘서트가 있었다. ‘마음에 꽃을 심다’는 3년 전에 글로벌이코노믹에 연재했던 칼럼 중에서 골라 출판했던 책이다. 코로나로 인해 출판기념회도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는데 뒤늦게라도 북 콘서트를 하였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북 콘서트 말미에 독자와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분이 내게 직접 야생화도 키우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했다. 들이나 산을 지나다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면 아무 곳에나 피어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들이 피어 있는 자리는 꽃을 피우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에 그곳에 피어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뿌리 내린 야생화를 인간의 욕심으로 함부로 캐어 옮겨 심으면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기 십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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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고 나무를 보는 일이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완상(玩賞)하는 일이 아님을 세월이 흐를수록 절감하게 된다. 낙엽 한 장에서 천하의 가을을 보는 시인의 안목이 아니라 해도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준다. 그중에도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거기에 알맞게 자신을 추스르는 나무들을 볼 때면 천둥벌거숭이처럼 철모르고 살아온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지곤 한다. 때를 알아차린다는 것. 살아가는 데 그보다 중요한 덕목은 없다. 꽃 피울 때와 새 움을 틔울 때, 단풍 든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을 때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나무는 종자를 남길 수 없고 살아남을 수도 없다.

가을은 열매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대추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연록의 대추알과 푸른 감, 저녁 햇살을 받아 꽃처럼 예쁜 분홍빛 산딸나무 열매들, 때를 알아차리고 때맞춰 꽃 피운 나무들이 달고 있는 열매들은 여름내 햇살이 남긴 지상의 기록이다. 저 열매 속에 담긴 기록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대추 한 알’에서 태풍 몇 개, 천둥과 벼락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읽어내는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꽃이나 풀, 나무의 이름을 알고 부를 수만 있어도 자연은 기꺼이 우리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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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먹구름이 물러간 하늘엔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처서(處暑)가 지나며 눈에 띄게 꺼칠해진 나뭇잎들과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가을이 묻어난다. 딱히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가을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직감한다. 가을에 대한 기대감으로 유난스럽던 폭염의 기억도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여름 가면 가을이 오는 게 자연의 순리인데도 당장 선선해진 날씨가 고마울 따름이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사계절의 구분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올가을엔 어설프게 가을의 낭만을 흉내 내기보다는 오감으로 가을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꽃으로, 열매로, 색과 향기로 전해 오는 가을의 말씀을 빠짐없이 채록하고 싶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