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인텔이 D램을 창시했으나 일본의 공세에 밀려 메모리 사업을 접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등 숱한 미국 기업들도 백기 투항하며 떨어져 나갔다. 그 피비린내 나는 치킨게임의 생존자로서 미국 땅에 유일하게 남아 워싱턴의 반도체 자립 플랜을 떠받치고 있는 팹이 바로 마이크론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꿈의 정점에 서서 한국의 독주 체제를 정면으로 흔들고 있는 인물이 바로 산제이 메흐로트라(Sanjay Mehrotra)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다.
뉴욕증시에서는 그를 두고 ‘메모리의 신(神)’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인다. 낸드 플래시의 태동기였던 1988년 샌디스크(SanDisk)를 공동 창업해 글로벌 모바일 저장장치 표준을 세웠다. 2017년 마이크론의 사령탑을 맡은 뒤에는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첨단 1b 공정 전환을 신속하게 완수하며 엔비디아의 핵심 공급망을 꿰찼다
실리콘밸리로 향한 인도 청년의 집념
산제이 메흐로트라는 1958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유서 깊은 공업 도시 칸푸르(Kanpur)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인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는 수학과 물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인도의 명문 공과대학인 BITS 필라니(Pilani)에 입학해 공학 기초를 닦았다. 그의 목표는 일찌감치 반도체의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를 향해 있었다.
미국행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미 대사관의 까다로운 비자 심사 탓에 메흐로트라는 연속 세 차례나 비자 인터뷰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의 부친은 포기하지 않고 미 영사를 직접 찾아가 설득했고, 네 번째 도전 끝에 간신히 학생 비자를 받아냈다. 어떠한 난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메흐로트라 특유의 뚝심은 이 좌절과 재도전의 경험에서 배양되었다.
미국에 입국한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 Berkeley)에 진학해 전기공학 및 컴퓨터과학(EECS)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버클리에서의 치열한 연구는 훗날 그가 반도체 소자의 물리적 한계를 돌파하며 70여 개가 넘는 핵심 원천 특허를 확보하는 공학적 자산이 되었다.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SEP)을 수료하며 기술과 경영을 융합하는 안목을 완성했다.
인텔을 거쳐 샌디스크 창업: 87% 이익률의 신화
학업을 마친 그는 1980년대 초 인텔(Intel)에 입사해 비휘발성 메모리 설계 엔지니어로 경력을 쌓았고, SEEQ 테크놀로지와 IDT를 거쳤다.전환점은 1988년에 찾아왔다. 당시 컴퓨터 저장장치는 부피가 크고 충격에 취약한 자기 테이프와 회전식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가 지배하고 있었다.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유지되는 플래시 메모리의 잠재력을 간파한 메흐로트라는 동료인 엘리 하라리(Eli Harari), 잭 유안(Jack Yuan)과 함께 샌디스크(창업 당시 선디스크)를 세웠다.
초창기 플래시 메모리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과 낮은 내구성 탓에 시장의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메흐로트라는 한 셀에 여러 비트를 저장하는 다층 셀(MLC) 기술과 이를 제어하는 지능형 컨트롤러 알고리즘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며 플래시의 저장 용량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가격을 낮췄다. 디지털카메라용 CF 카드, 스마트폰용 SD 카드, USB 드라이브 등 오늘날 전 세계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휴대용 저장 매체의 표준이 그의 손끝에서 정립되었다.
2011년 샌디스크의 CEO로 취임한 그는 회사를 단순 부품 제조사에서 기업용 엔터프라이즈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 공급사로 재편했다. 비휘발성 메모리에 대한 원천 특허권과 고부가가치 솔루션 제품군을 바탕으로 샌디스크는 특정 고마진 라인업과 라이선스 사업에서 무려 87%에 달하는 경이적인 부문별 매출총이익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일본 도시바(현 키옥시아)와의 긴밀한 팹 합작을 통해 설비 투자 리스크를 줄이고 수율을 극대화한 전략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2016년 그는 샌디스크를 글로벌 스토리지 거인 웨스턴 디지털(Western Digital)에 약 190억 달러(약 22조 원)에 매각하며 벤처 창업의 정점을 찍었다.
마이크론 사령탑: 만년 3위의 체질
2017년 5월, 샌디스크 매각 후 휴식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그를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신임 사장 겸 CEO로 전격 영입했다.그 당시 마이크론은 패색이 짙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D램 시장에서 ‘만년 3위’에 머물러 있었고, 미세공정 전환 속도와 원가 경쟁력 모두에서 한국 기업들에 크게 뒤처져 있었다. 낸드 부문 역시 인텔과의 합작 체제가 한계에 봉착해 독자 노선 구축이 시급했다.
메흐로트라는 부임하자마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낸드 부문에서 인텔과의 오랜 기술 제휴를 과감히 정리하고 독자적인 고단수 3D 낸드 개발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마이크론은 2020년 업계 최초로 176단 3D 낸드를 출하하며 시장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곧이어 232단 낸드 양산까지 선점하며 만년 기술 후발주자의 오명을 단숨에 털어냈다.
D램에서도 승부수를 던졌다.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도입이 한국 경쟁사들보다 늦어지자, 기존 불화아르곤(ArFi) 노광 장비를 한계치까지 활용하는 다중 패터닝 기술을 채택해 1알파(1a), 1베타(1b) D램 양산 시점을 파격적으로 앞당겼다. 이는 경쟁사들이 EUV 공정의 수율 안정화와 막대한 감가상각비로 고전하는 동안 마이크론이 원가와 납기를 확보하며 시장 점유율을 방어하는 전술적 묘수로 작용했다.
AI 시대와 HBM3E 직행: 생태계 판도를 뒤흔든 승부수
산제이 메흐로트라의 진가는 생성형 AI가 폭발하며 열린 엔비디아 천하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GPU의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고대역폭 메모리(HBM) 경쟁에서 마이크론은 본래 HBM2와 HBM2E 시절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전무한 주변부에 불과했다.
메흐로트라는 중간 과정을 과감히 건너뛰고 5세대 규격인 HBM3E 직행을 결단했다. 1b 공정 기반의 진보된 실리콘 관통 전극(TSV) 패키징을 바탕으로 경쟁사 대비 전력 소모를 획기적으로 낮춘 8단 및 12단 HBM3E를 신속하게 시장에 내놓았고, 마침내 엔비디아의 핵심 AI 가속기 공급망 진입에 성공했다. 한국의 두 기업이 양분하고 있던 AI 메모리 독점 체제에 균열을 가한 일대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는 미국 중심의 반도체 지정학적 질서를 완벽히 활용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 이사이자 워싱턴 조야의 가장 유력한 테크 자문역으로서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의 입법과 실행을 적극 뒷받침했다. 이를 통해 뉴욕주 클레이의 초대형 메가팹과 아이다호 본사 R&D 팹 확충을 위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연방 보조금을 따내며 장기적인 생산 인프라 확충의 발판을 마련했다.그가 40년간 메모리 산업의 기초 체력을 다지고, 2022년 미국 국립공학한림원(NAE) 회원 선출과 2023년 반도체 업계 최고 권위인 로버트 N. 노이스상(Robert N. Noyce Award)을 거머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한 산업적 성취다.
그를 둘러싼 환호 이면에는 명확한 한계도 상존한다.우선 생산 능력(Capa)의 절대적 격차다. 최첨단 HBM3E 공급망에 발을 들였지만, 글로벌 빅테크의 폭발적인 대량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전체 웨이퍼 캐파와 어드밴스드 패키징 양산 규모에서 마이크론은 여전히 한국의 두 거인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EUV 도입을 미루며 거둔 단기적 수율 효과는 향후 10나노급 1c, 1d 공정의 극미세 패턴 형성 과정에서 물리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차세대 설비 전환에 따른 막대한 자본적 지출(Capex)과 메모리 다운사이클의 충격은 여전히 마이크론의 재무 건전성을 위협하는 뇌관이다.
산제이 메흐로트라는 초자연적인 ‘신’이 아니다. 그는 반도체 물리를 꿰뚫어 보는 일류 공학자이자, 지정학과 시장의 틈새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냉혹한 실리콘밸리형 자본주의 전략가다.미국 비자 발급이 세 차례나 거절당했던 인도 청년이 실리콘밸리 벤처의 신화를 쓰고, 만년 3위로 주저앉아 있던 미국의 메모리 자존심을 세계 최고 수준의 AI 반도체 핵심 공급사로 변모시킨 것은 하나의 거대한 실체적 사건이다.
그의 질주는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과거의 기술적 우위에 취해 관성에 안주하는 순간, 강력한 원천 특허와 미국의 국가주의적 산업 정책, 그리고 신속한 실행력으로 무장한 메흐로트라의 마이크론이 언제든 판을 뒤엎을 수 있음을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마이크론이라는 미국의 꿈을 현실로 바꾸고 있는 산제이 메흐로트라, 그의 손끝에서 글로벌 반도체의 새로운 질서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