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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멤플레이션(Memflation)...시스코 닷컴버블 붕괴 역사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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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주필 겸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
2001년 5월 8일, 그 당시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잘나가던 뉴욕증시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시스코 시스템즈(Cisco Systems)에서 전대미문의 참혹한 재고 소각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가 사활을 걸고 애지중지 만들어왔던 최첨단 제조 제품들을 창고에서 꺼내 무더기로 폐기하며 땅에 묻어 버리는 충격적인 일이 터졌던 것이다. 재고소각으로 단 한순간에 기업의 회계 장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산 금액만 무려 22억 달러에 달했다. 경영 사학자들은 이 잔혹한 참상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과오이자, 닷컴버블 붕괴의 도화선이 된 '시스코 재고 소각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스코는 2000년 3월 소프트웨어의 제왕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MS)를 단숨에 제치고 글로벌 시가총액 정상에 등극했던 위대한 정보기술(IT) 제국이었다. 199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닷컴버블 시기 내내 전 세계 주식시장을 통틀어 주가 상승률 1위를 기록하며 인터넷 시대를 독점했던 당시 시스코의 압도적인 위상은, 오늘날 인공지능(AI) 반도체 랠리를 홀로 주도하며 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엔비디아(NVIDIA)의 현재 지위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히 일치한다.

지금 가장 무서운 위험은 이른바 '멤플레이션(Memflation)'이라는 기괴한 현상이다. 메모리(Memory)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반도체의 급격한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 공포에 휩싸인 전방 테크 기업들이, 실제 자신들에게 필요한 진성 수요보다 훨씬 많은 주문을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내는 '가수요 폭발' 현상을 뜻하는 거시경제적 경고등이다. 현재 실리콘밸리의 거대 빅테크 기업들은 미래의 AI 인프라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엔비디아의 가속기와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단 한 개라도 더 확보하려는 처절한 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밀려드는 주문으로 인해 반도체 제조사들의 제품 인도 기간(리드타임)은 수개월에서 1년 단위로 늘어났고 제품 단가는 천정부지로 폭등했다. 이 극단적인 병목 현상 과정에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아마존 같은 글로벌 테크 공룡들은 "지금 당장 메모리를 사두지 않으면 경쟁에서 영원히 도태되어 사멸할 것"이라는 최악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미래 사업 계획에 실제로 필요한 적정 물량의 두 배, 세 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중복 주문(Double Ordering)을 여러 공급 경로에 무차별적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공급망 왜곡과 장부상의 착시는 2001년 시스코 사태를 유발했던 근본적인 원인과 본질적으로 완벽하게 부합한다. 당시 전 세계의 수많은 닷컴 벤처기업들과 대형 통신사들은 광통신 인터넷망을 전국에 구축하기 위해 시스코의 제품을 서로 먼저 받으려고 수십 군데의 대리점과 제조사에 수많은 중복 주문을 동시에 집어넣었다. 제품이 모자란다는 소문이 돌자 불안해진 기업들이 주문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부풀린 것이다. 시스코의 장부에는 수년 치에 달하는 엄청난 대기 주문이 쌓여 나갔고, 경영진은 이 허수를 진짜 시장의 진성 수요로 오인하는 치명적인 착각을 범하고 말았다. 시스코는 몰려드는 주문서를 기반으로 부품 생산량과 원자재 매입을 무차별적으로 늘리며 공장을 가동했다. 그러나 수익 모델이 부실했던 수많은 닷컴 벤처기업들이 단기간에 수익을 내지 못하고 연쇄 도산의 길로 접어들자, 장부상에 가득했던 수억 달러의 대기 주문들은 단 하룻밤 사이에 유령처럼 공중으로 분해되며 사라져 버렸다. 계약 취소가 도미노처럼 속출하면서 시스코의 창고에는 단 한 대도 팔리지 않는 거대한 제품 장벽이 쌓였고, 결국 회사는 이를 감당하지 못해 멀쩡한 제품을 땅에 묻으며 대규모 손실 처리를 감행했다. 이 여파로 시스코의 주가는 최고점 대비 90% 가까이 폭락하며 시장에 파멸적 재앙을 안겼다.
오늘날 글로벌 테크 생태계를 이끄는 AI 반도체 시장 역시 이와 유사한 성격의 붉은 경고등이 이미 사방에서 켜진 상태다. 빅테크 기업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사정없이 쏟아부어 전 세계 곳곳에 거대한 AI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지만, 정작 이 막대한 인프라가 투입한 자본만큼의 실질적인 수익(ROI)을 확실하게 회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현시점에서 그 누구도 명확하고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거대 테크 기업들이 아닌 일반 제조 기업이나 최종 개인 소비자들이 생성형 AI 서비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꺼이 매달 거액의 유료 결제를 감행함으로써, 빅테크의 매출 구조를 획기적으로 올려주지 못한다면 지금의 광적인 인프라 투자는 어느 한순간 급격히 둔화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다. 테크 기업들의 자체 자금줄이 막히거나 주주들의 압박으로 인해 투자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순간, 그동안 미래의 공급 부족에 대비해 창고에 쟁여두었던 엄청난 분량의 반도체 재고들은 순식간에 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악성 자산으로 돌변하게 된다. 메무플레이션이 만들어낸 가짜 수요의 두터운 거품이 걷히는 순간, 현재 반도체 기업들이 누리고 있는 장부상의 역대급 호실적은 곧바로 끔찍한 재고 충격과 실적 쇼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현재의 AI 기술과 관련 산업 생태계가 과거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 시절의 실적 없고 부실했던 유령 벤처기업들처럼 완전히 실체가 없는 신기루나 사기극이라는 말은 아니다. 거대언어모델(LLM)과 고도화된 AI 알고리즘은 이미 글로벌 산업 전반에서 노동 생산성을 혁신적으로 높이고 있다. 비즈니스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가시적인 경제적 변화를 실제로 이끌어내고 있다. 기술적 진보의 깊이와 완성도는 과거 인터넷 초창기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정교하다. 하지만 기술의 실체적 완성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공급망 내부의 깊숙한 곳에서 주기적으로 작동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탐욕과 공포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과거의 역사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장이 한쪽 방향으로 지나치게 과열될 때 발생하는 대규모 주문 부풀리기와 공급망 왜곡 현상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온 인간 경제 활동의 본질적인 한계다.

지금 반도체는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과 역대급 초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축제의 정점에서, 우리는 25년 전 시스코의 재고 소각 사건이 눈물로 남긴 잔혹한 경영학적 교훈을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닷컴버블이 터질 때에도 바로 그 직전까지 뉴요증시에서는 축포가 터졌었다. 글로벌 고객사들이 매일같이 보내오는 화려한 주문서의 숫자가 전 세계 최종 소비자들이 시장에서 실제로 소비하는 진성 수요에 기반한 것인지, 아니면 물량을 잡지 못해 불안감에 찌든 테크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메무플레이션의 허상이자 신기루인지를 철저하고 냉정하게 발라내야 하는 시점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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