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MS 등 '메모리 확보 전쟁'에 공급자 우위 정점… 2026년 역대급 실적 예고
PC·중저가 시장은 공급망 붕괴로 '고사 위기'… 반도체 삼국지, AI발 양극화 심화
PC·중저가 시장은 공급망 붕괴로 '고사 위기'… 반도체 삼국지, AI발 양극화 심화
이미지 확대보기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한국 반도체 생산 현장에 전례 없는 '백지수표'를 던지고 있다.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등 글로벌 IT 거인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선점하기 위해 수조 원대의 선지급금을 제안하며 SK하이닉스 생산 라인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과거 메모리 업황이 고객사의 재고 조정에 휘둘리던 '천수답' 구조에서 벗어나, 이제는 제조사가 갑(甲)의 위치에서 공급을 조절하는 '슈퍼 을(乙)'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8일(현지시간)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들을 인용해 글로벌 빅테크들이 SK하이닉스에 전용 생산 라인 구축 비용을 전액 투자하거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 고가 제조 설비 구매 자금을 직접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쏟아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돈은 얼마든 낼 테니 물량만 달라"… 뒤바뀐 반도체 권력 지형
현재 SK하이닉스에 답지하는 제안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선불 금융' 모델이다. 고객사가 필요한 물량의 30~40%에 달하는 대금을 미리 지급하거나, 네덜란드 ASML의 EUV 장비 구입비를 대신 내주겠다는 방식이다. 한 대당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EUV 장비는 차세대 칩 제조의 필수 관문으로, 이를 고객사가 직접 지원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공급망 리스크를 함께 짊어지겠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현상은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빅테크들의 설비투자(CAPEX) 규모와 궤를 같이한다. 당초 6500억 달러(약 951조 원)에서 1분기 이후 투자 규모가 7250억 달러(약 1061조 원)로 늘었다. 메타(Meta)의 경우 미래 용량 확보를 위해 공급망 전반에 걸친 장기 계약을 체결 중이다.
다만 SK하이닉스는 이 같은 구애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정 업체에 생산 라인을 묶어둘 경우 향후 가격 협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SK하이닉스 측은 "기존 계약과는 다른 구조적 대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공급자 우위 시장에서의 전략적 판단에 집중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마이크론 주가 80% 폭등… '반도체 삼국지' 역대급 호황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이번 메모리 랠리의 최대 수혜주로 떠올랐다. CNBC에 따르면 마이크론 주가는 최근 한 달 사이 84% 급등하며 시가총액 8400억 달러(약 1230조 원)를 돌파했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의 주간 상승률이다.
삼성전자 역시 이번 주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464조 원) 클럽에 가입하며 애플, 알파벳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삼성,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삼국'이 전 세계 D램 공급의 90% 이상을 장악한 상황에서, AI 수요가 불러온 '구조적 성장'이 이들의 실적을 포물선형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2D NAND 시장의 습격… 중저가 PC 시장은 '암흑기'
반면 AI가 부르지 않은 곳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삼성과 마이크론 등 주요 업체들이 수익성이 낮은 구형 공정(2D NAND)에서 철수하면서, 가전과 산업용 기기에 쓰이는 MLC·SLC 낸드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디지타임스(DIGITIMES)에 따르면 MLC 제품 가격은 지난해 말 대비 최대 300%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부품값 상승은 PC 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독일 컴퓨터베이스(ComputerBase)는 올해 전 세계 메인보드 출하량이 전년 대비 최대 30% 폭락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메모리 공급망 붕괴와 가격 급등으로 중저가 PC 가격이 오르면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았기 때문이다. AI PC 교체 수요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는 가운데, 고가의 부품비가 시장의 발목을 잡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투자자가 챙겨야 할 3대 체크포인트
앞으로 반도체 시장의 향방을 가를 변수는 세 가지다. 첫째, 빅테크의 설비투자(CAPEX) 지속 여부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의 자금 집행 속도가 둔화될 경우 메모리 업계의 '슈퍼 을' 지위도 흔들릴 수 있다. 둘째, HBM 단가 추이다. 공급 부족이 심화되고 있으나 고객사들의 비용 부담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저가형 솔루션으로의 선회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셋째, PC 및 스마트폰 등 전통적인 IT 수요의 회복세다. AI 서버 외 분야에서의 부진이 장기화될 경우 전체 반도체 업계의 실적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메모리 시장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말을 고르다가 잘못된 말을 지지하고 싶지 않다"는 업계 관계자의 말처럼, 지금의 호황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 '단기 실적'과 '장기적 주도권' 사이에서 가장 치밀한 전략을 요구받는 골든타임에 서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