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EU 천문학적 지원금에도 기술·인재 장벽 '요지부동'
ASML 병목 여전… 중국, 범용 칩 장악하며 제4 블록 완성
"보조금은 시간 버는 수단… TSMC 30년 제조 문화 복제 불가"
ASML 병목 여전… 중국, 범용 칩 장악하며 제4 블록 완성
"보조금은 시간 버는 수단… TSMC 30년 제조 문화 복제 불가"
이미지 확대보기152조 원 쏟아부은 미·EU… 낳은 건 '세 개의 기술 문명'
미국은 '반도체 과학법(CHIPS Act)'을 통해 520억 달러(약 78조 원)를 투입했다. 유럽연합(EU) 역시 430억 유로(약 74조 원) 규모의 보조금 정책을 가동했다. 미·EU 두 축만 더해도 152조 원을 웃돌며, 일본·인도가 추가 투자를 경쟁적으로 집행하면서 전 세계 반도체 보조금 총액은 수백조 원대로 불어났다.
실리콘 캐널은 이를 두고 "단순한 공장 이전이 아닌, 세 개의 서로 다른 기술 문명이 탄생하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우선 대만의 '디아스포라' 블록이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고 있지만, 2나노미터(nm) 이하 최첨단 공정은 대만 본토에 묶어두는 전략을 고수한다. 미국에 이전하는 기술은 한 세대 뒤처진 것으로, 대만은 핵심 기술 통제권을 유지한 채 미국의 안보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치고 있다.
다음은 한국의 '삼성-메모리' 넥서스 전략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로직 반도체를 수직 계열화하는 독자 노선을 걷는다. 3나노 공정에 도입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구조는 TSMC 방식과 공학적 철학 자체가 다르다. 기술 표준이 분기하면서 생태계 호환성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세 번째는 미국의 '인텔 회생' 프로젝트다. 인텔은 'IDM 2.0' 전략으로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 재진입을 선언했다. 1.8나노(18A) 공정의 성패가 미국 반도체 자급률의 시금석이 됐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인재 부족과 수율의 함정
전문가들은 보조금이 경쟁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공장은 돈으로 지을 수 있지만, 그 공장을 가동할 '사람'과 '숙련도'는 예산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TSMC 애리조나 공장은 대만 엔지니어와 미국 관리직 사이의 문화적 갈등, 숙련공 부족으로 가동 시점이 거듭 늦춰지는 진통을 겪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건물은 자금으로 세울 수 있지만, TSMC가 30년에 걸쳐 축적한 미세 공정 최적화 노하우와 제조 문화는 보조금으로 단기간에 이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인재 수급 위기도 심상치 않다. 업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은 2030년까지 반도체 전문 인력 약 6만 7000명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도 역대 최저 출생률의 직격탄을 맞아 20년 뒤 반도체 생태계를 유지할 전문 인력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세 블록은 한정된 인재를 서로 빼앗는 '글로벌 인재 쟁탈전'을 벌이며 각자의 성벽을 높이고 있다.
ASML 장비 병목과 '제4의 블록' 중국의 역습
반도체 자급을 향한 각국의 야심은 상류 공급망의 병목이라는 벽에 맞닥뜨렸다. 네덜란드 ASML이 사실상 독점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핵심이다. 대당 수천억 원에 달하는 이 장비는 주문 후 납품까지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많은 보조금을 투입해 클린룸을 지어도 ASML 장비가 도착하지 않으면 공장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서방의 첨단 장비 수출 규제를 정면으로 맞은 중국은 역설적으로 '제4의 기술 문명'을 구축하는 중이다. 28나노 이상 범용(레거시) 반도체에 집중 투자해 전 세계 가전·자동차·산업용 반도체 시장을 잠식하는 전략이다. 시장 조사기관들은 중국이 2020년대 말까지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확보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리콘 캐널은 "첨단 기술에서 소외된 중국이 오히려 전 세계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초 반도체 층'을 독점하며 독자 생태계를 완성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보험료를 내는 시대"
지난 40년간 추구해온 비용 효율 중심의 글로벌 분업 구조는 종말을 고했다. 반도체를 구매할 때 '가격'이 아니라 '어느 정치적 블록에 속한 칩인가'를 먼저 따져야 하는 시대가 됐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 변화를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보험 정책"으로 평가한다. 하나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세 개로 복제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은 결국 소비자 가격 상승과 기술 발전 속도 저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반도체 공정은 2~3년마다 대규모 재투자가 불가피해 각국 정부는 한번 투입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재정 부담을 안게 됐다.
기술 우위보다 자국 정부의 전략적 비전과 얼마나 깊이 결합되어 있느냐가 기업 생존을 가르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반도체 독립을 외치는 세계가 역설적으로 더 비싸고 더 파편화된 기술 질서의 덫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