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달러화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 가능성이 점쳐지자 지난해 9월부터 줄곧 상승했고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더욱 기세를 올리며 지난해 4분기에만 7.1% 급등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부터 주요 교역국에 고율의 관세 부과를 공언하면서 무역 전쟁 가능성에 불을 지피자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재점화하며 달러 강세를 주도했다.
가뜩이나 고물가 기조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고율 관세 부과가 수입물가를 더 끌어올릴 것이란 우려 속에 미국의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자 달러화 매수 열기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2월 이후 시장 분위기는 달러 매도 쪽으로 사뭇 돌아섰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지수는 지난해 12월 110을 터치했지만, 4일(현지시각) 뉴욕 시장에서는 105.48까지 떨어지며 힘이 빠진 기색이 역력하다.
관세 불확실성에 따른 미국의 경기 둔화 위험이 커지고 특히 지난주 이후 발표된 미국의 소비 등 경제 지표들이 속속 냉각된 것으로 나타나자 한동안 주춤했던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감도 되살아났다. 이는 달러화에는 모두 부정적인 소식이다.
17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마운트 루카스의 데이비드 아스펠 공동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블룸버그에 "한동안 시장은 미국 행정부 정책의 긍정적인 면에만 가격을 매겼다"면서 "이제는 그들의 정책이 성장에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가격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운트 루카스는 대선 이후 미국 경제의 성장에 대한 열기가 사그라들자 영국 파운드화와 멕시코 페소화 등에 대해 달러를 매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슬럼프'
트럼프 대통령의 대규모 감세 정책 또한 달러 약세 요인으로 꼽힌다. 안 그래도 재정 적자 규모가 사상 최대치에 달한 상황에서 감세 정책까지 가세하면 재정 적자가 더 늘어나면서 달러화를 압박할 수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과거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트럼프의 경제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반짝 호황을 끌어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미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 빠져드는 ‘트럼프 슬럼프’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당시 트럼프의 감세 정책으로 기업과 부자들이 수혜를 입을 뿐 정책이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해악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날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의 레이 달리오 창업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당장 재정적자 감축에 나서지 않으면 3년 이내에 심각한 부채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달러, 트럼프 1기 약세 재현하나
지난주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2017년 트럼프 행정부 1기 당시의 달러화 약세가 재현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블룸버그 달러 지수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난 2017년 연간으로 8% 하락하며 사상 최악의 흐름을 보였다.
모건스탠리의 앤드루 워트러스 등 전략가들은 "올해도 미국 달러화가 비슷한 궤적을 그릴 수 있다"면서 "달러가 2017년에 하락했던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올해 하락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전략가들은 2017년 달러가 하락한 이유로 미국의 무역 정책, 글로벌 성장 및 유럽의 정치 지형 등을 언급했다.
엔화·파운드화 주목해야
발 빠른 투자자들이 이미 달러화에서 다른 주요국 통화와 심지어 신흥국 통화로 이동한 가운데 시장에서는 달러화의 매력이 줄어들수록 일본 엔화와 영국 파운드화를 주목하는 분위기다.
캐나다와 멕시코 및 중국에 대한 미국의 관세가 발효됐고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 중단에 돌입한 가운데 유럽 지도자들이 국방비 증액을 약속하면서 글로벌 외환시장의 밸류에이션에도 지각변동이 예상되고 있다.
퀀텀 스트래티지의 데이비드 로쉬 전략가는 일본 엔화가 서방의 지정학적 불안정으로 인해 "새로운 안전자산 피난처로 굳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의 경제 펀더멘털이 개선되고 있고 일본은행(BOJ)이 G10(주요 10개국) 중앙은행 중 유일하게 긴축 기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엔화를 매력적으로 부각시키는 요인이다.
일본의 정책 환경 또한 엔화에 호재로 꼽히면서 엔화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5%가량 상승했다.
영국 파운드화도 트럼프 관세 전쟁의 상대적 승자로 부각되고 있다. 영국의 대미 무역 흑자 규모가 크지 않고 유럽의 지정학적 위기에서 한 발 떨어져 있다는 점도 파운드화의 매력을 높이는 요인이다.
라보뱅크의 폴리는 “영국의 대미 무역 흑자가 완만하다는 사실은 영국이 트럼프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작다는 것을 시사한다”면서 ”파운드가 유로에 비해 계속해서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파운드화는 올해 들어 미국 달러 대비 1.6%정도 올랐다.
달러 지수는 지난해 연간으로 7% 상승한 이후 올해 들어서는 2% 하락했다.
이수정 기자 soojunglee@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