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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 연출·안무의 연극 '갈매기 날다', 비상을 꿈꾸는 자들에게 보내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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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 안무·연출의 연극 '갈매기 날다'
8월 15일(토)부터 18일(일)까지 국립중앙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 ‘퍼포먼스그룹 153’(대표 황미숙)의 '갈매기 날다'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번안극이다. 황미숙의 연출·안무는 원작의 서사적 골격을 인간의 욕망과 좌절, 상처와 회복, 예술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현재적 삶의 맥락 속으로 이식한다. 연극·무용·영상·라이브 음악을 결합하여 장르 간 경계를 허문 총체극 형식을 구축한다. 이 작품은 체호프의 고전적 텍스트의 원작이 지닌 인간학적 질문을 새로운 공연 언어로 번역하려는 적극적인 ‘재창작의 시도’의 모습을 보였다.
무대 구성에서 이채로운 점은 배우 중심의 연극적 구조에 여섯 명의 무용 퍼포머와 첼리스트 박혜준, 이스트맨 밴드의 라이브 연주였다. 공연 전부터 이어진 밴드의 연주와 퍼포머들의 움직임은 관객을 전통적인 연극 관람의 수동적 위치에서 벗어나 공연의 분위기와 리듬을 선행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이러한 장치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불안과 생동감, 욕망의 에너지를 감각적으로 예고한다. 음악과 신체 움직임이 서사의 부수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극적 긴장을 확장하는 표현 수단으로 이 작품의 형식적 실험은 설득력을 갖는다.

샤막에 구현된 ‘바다’ 이미지는 작품의 상징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핵심적인 시각 장치이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겹쳐 지는 갈매기 울음은 정적인 무대에 지속적인 운동성을 부여하면서 실제 해변에 와 있는 듯한 감각적 착시를 제공한다. 체호프의 원작에서 호수가 지니는 정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가 변화무쌍한 바다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갈매기’라는 상징도 자유와 비상, 욕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기호로 확장된다. 결국 바다는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를 시각적으로 반영하면서, 작품의 내면적 갈등을 외부의 풍경으로 치환한다.

황미숙은 원작의 방대한 인물군 가운데 핵심적인 갈등 구조를 선별하여 다섯 인물로 압축함으로써 서사의 집중도를 높였다. 과거의 명성과 젊음을 붙들려는 배우 갈지나, 창작을 명분으로 사랑과 욕망까지 작품 재료로 삼는 작가 백곤, 예술적 성공을 꿈꾸는 니나, 사랑과 신뢰의 좌절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묻는 보인, 새롭게 설정된 정신과 의사 도민은 원작의 인물적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심리극의 성격을 강화한다. 도민은 인물들의 정신적 상처를 객관화하는 관찰자의 시선을 제공한다. 인물 재편은 작품이 추구하는 예술과 욕망, 관계와 상처의 문제를 선명하게 부각한다.
인물들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에는 예술을 향한 열망이 사랑과 욕망, 상실과 자기파괴로 변질될 수 있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놓여 있다. 갈지나는 쇠퇴하는 명성과 젊음에 집착하고, 백곤은 창작자의 욕망 아래 타인의 삶마저 작품의 소재로 삼으며, 니나는 예술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사랑을 희생하며 심각한 내적 상처를 입는다. 보인은 배신을 당하면서 자신을 재인식하고, 도민은 인물들의 정신적 균열을 바라보며 고통의 원인과 회복 가능성을 탐색한다. 인물군에서 '갈매기 날다'는 예술이 인간 구원의 힘이며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양가적 욕망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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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는 '벚꽃동산', '바냐 아저씨'와 더불어 지난 세기 동안 수많은 연출가에 의해 시대적 감각에 맞게 변주되어 왔지만, 원작의 정서적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대 관객의 감각에 밀착시키는 작업은 여전히 쉽지 않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고,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역설은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이지만, 이를 무대 위에서 설득력 있게 육화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심리적 해석과 과감한 연출적 결단이 동시에 요구된다. 황미숙의 '갈매기 날다'는 인간 감정의 원초적 층위에 과감하게 접근했다.

배우 갈지나 역의 정아미는 작품의 의미와 배역의 삶을 이해하고 대사에 충실하면서 진실하게 연기해 내었다. 그녀는 성격, 욕망, 갈등, 관계, 상황을 분석하는 등 인물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특히 극 중 상황을 실제로 경험한 듯 연기해 내며 자연스럽게 감정을 전달하였다. 상대 배우와의 교감도 절제미가 있었으며, 몸과 목소리의 정확한 사용으로 절제와 집중을 이끌었다. 정아미는 자신의 연기가 작품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생각하는 노련한 연기자의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인물의 내면과 작품의 주제를 섬세하게 연결하여 관객에게 깊은 여운과 감동을 남겼다.

체호프의 '갈매기'는 사랑과 욕망, 상처와 좌절이 서로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인간 존재의 구조를 띈다. 원작에 충실한 재현 공연들은 상당수가 인물과 사건의 외형을 보존하는데 치중하며 내면의 정서적 진폭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고, 과도한 해체와 재해석의 경우에는 체호프 특유의 인간적 연민과 아이러니에서 멀어지는 한계를 도출했다. 황미숙은 이러한 양극단을 피하여 체호프의 인물들 가운데 욕망과 사랑, 좌절과 상실이라는 핵심 정서를 구현하는 관계만을 호출한다. 이는 인물 사이의 정서적 인과관계를 압축하여 극의 에너지를 특정한 충돌 지점에 집중시킨다.

무대는 갈지나와 보인의 모자 갈등에서 출발하여 니나와 백곤의 사랑과 상처, 갈지나와 백곤 사이의 격렬한 애증, 니나와 보인의 좌절된 사랑, 갈매기처럼 삶의 바다를 부유하는 보인의 상실을 조망한다. 인물의 관계를 정서적 교환이 뚜렷한 축으로 재편하여 작품은 서사적 외피를 벗고 인간관계의 원초적인 충돌을 전면에 부각한다. 이 공연은 감정을 관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인물과 인물을 직접 맞부딪치게 하여 사랑과 욕망의 진폭을 육체적이고 즉각적인 형태로 가시화한 결과 체호프의 비극적 인물들은 욕망하고 상처받으며 서로를 밀어내는 동시대적 인간으로 다시 살아난다.

인간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무대화하는 방식에는 필연적으로 통속성이라는 위험이 따른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라는 외피를 벗겨내고 사랑과 질투, 욕정과 집착만을 남겨놓으면 고전적 비극은 자칫 통속소설이나 자극적인 멜로드라마의 문법으로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황미숙은 이러한 위험을 침대라는 구체적 오브제를 통해 역설적으로 활용하면서 남녀의 욕망과 애증을 신체적 관계와 무대적 상황으로 드러내고, 인간 감정의 본능적 층위를 전면화한다. 이 작품은 사랑과 욕망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통해 인간관계의 불안정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백곤과 니나, 니나와 보인, 보인과 갈지나의 충돌은 배우들의 격렬한 감정 연기를 통해 한층 현실적인 밀도로 확장되며, 언어와 연기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 여백은 다양한 공연 요소를 통해 보완된다. 갈매기를 형상화한 퍼포머들의 움직임과 라이브 밴드의 강렬한 비트, 심층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첼로의 즉흥 연주는 인물들의 내면을 신체적·청각적 이미지로 전환하며, 조명과 음향, 영상은 이러한 감정의 파장을 무대 전체로 확산시킨다. 객석까지 하나의 감각적 환경으로 포섭하려는 연출은 관객을 작품의 정서적 진동을 함께 체험하는 참여자로 위치시킨다.

황미숙 연출이 선호하는 캐릭터는 더 본능적이고 강한 에너지가 흘러야 하고, 욕망을 적극적으로 폭발하고 밀어붙여야 한다. 일반적인 감정 연기로 안되는, 무대 배경에서 춤 동작 하나, 음악의 선율 한 자락까지 배우들의 호흡과 맞아야 하는 토탈 씨어터는 관객들에게 충격적 체험을 안겨 줄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자면 배우들도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인공 정아미는 가발을 쓴 머리 끝부터 하이힐의 화려한 구두까지 평소 무대에서 보아왔던 이미지와는 너무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연기 스타일도 다소 과격할 정도로 강하게 설정, 자신의 단점을 가리려는 직접 표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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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 연출이 체호프의 원제 '갈매기'에 붙인 ‘날다’는 작품의 의미 지평을 확장하는 연출적 선언이다. ‘날다’는 비상이나 공간적 이동을 넘어, 상처와 실패를 감내하면서도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는 실존적 행위로 의미화된다. 사랑에 좌절하고 예술적 이상에 상처받으며 타인의 시선에 억압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이 제목에 함축된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갈매기 날다'에서 비상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나’를 선택하려는 인간의 자기 갱신의 상징이다.

이 작품의 뚜렷한 성취는 ‘갈매기’의 실체와 상징을 공연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환기했다는 점이다. 최근의 현실에서 총상을 입거나 박제된 갈매기의 이미지는 생명과 자유의 역설을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갈매기'를 무대화한 많은 공연에서는 갈매기가 지닌 상징적 의미가 충분한 강도로 체감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갈매기 날다'는 갈매기의 움직임과 형상을 퍼포먼스와 영상, 음향의 층위로 확장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갈매기’라는 명제를 관객의 감각 속에 각인시킨다. 갈매기는 사랑과 실패, 억압과 자유, 추락과 재비상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인간 존재의 은유로 승화된다.

창작적 실험의 배경에는 배우이자 작가, 안무가이며 연출가인 황미숙의 다층적인 예술적 이력이 자리한다. 대학로에서 신뢰받아 온 배우 정아미를 비롯한 연기자들과 함께 작업해 온 황미숙은 1970년생으로 MBC 22기 공채 탤런트로 드라마와 영화 등 여러 매체의 연기 경험과 단편영화 연출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녀의 창작 방식은 특정 장르에 귀속의 전문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연기와 영상, 서사와 무대에 대한 복합적인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이런 이력은 '갈매기 날다'가 다 매체와 교차하며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독특한 미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대학원에서 무용을 전공한 황미숙은 2009년 이후 '운수 좋은 날', '메밀꽃 필 무렵', '봄의 제전' 등 안무 중심의 융합공연을 선보여 왔다. 이후 2018년을 전후하여 직접 집필하거나 기존 텍스트를 각색하고, 연극과 무용뿐 아니라 영상·미술·음악을 결합한 총체극 형식으로 창작 영역을 확장한 행보는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작업 궤적에서 '갈매기 날다'는 여러 장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공연 언어를 모색해 온 창작 여정의 연장선에 놓인다. 고전을 현재의 감각으로 소환하고 인간의 상처와 회복을 ‘날아오름’이라는 이미지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황미숙 특유의 총체극 미학이 한 단계 더 확장되는 의미 있는 실험이 되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서울연극협회 희곡분과회원), 사진=퍼포먼스그룹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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