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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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신현정 중부대학교 교수(교육학·일본어 전공)
안식년을 맞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놀라는 것은 '80세'가 더 이상 근로에서 은퇴를 의미하는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 근무한 대학의 총장은 총장직에서 은퇴한 뒤 사립고등학교 교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고, 그 생활도 어느덧 10년째를 맞고 있다. 올해 79세인 이웃집 할머니는 구립 스포츠센터에서 회원 접수를 담당하는 파트타임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올해 80세가 되는 한 지인은 수십 년간 경영해온 IT 기업을 후배에게 물려준 뒤 새롭게 글로벌 의료관광사업에 뛰어들었다. 아파트 주차 관리원과 식당의 조리사, 대학 주변 건설 현장의 작업자 가운데도 70대 후반의 고령자를 어렵지 않게 만난다.
처음에는 이것이 일본인의 근면성이나 성실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이는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초고령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은퇴'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이었다.
이미지 확대보기일본은 2007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 21% 이상)에 진입한 나라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노동력은 줄어들고,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본은 '은퇴 이후의 삶'을 새롭게 설계하기 시작했다. 일본 총무성의 노동력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취업자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70세 이상 취업자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이제 일본에서 은퇴는 노동을 끝내는 시점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시작하는 전환점으로 바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연금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물론 경제적 이유는 분명 존재한다. 평균수명이 90세에 가까워진 시대에 은퇴 이후 20~30년의 삶을 연금만으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의 물가 상승 역시 고령자의 경제활동을 지속시키는 요인이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만으로는 지금의 일본을 설명하기 어렵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벌인 고령자 취업 관련 조사에 따르면 고령자들이 계속 일하는 이유는 생활비 확보뿐만 아니라 건강 유지, 사회와의 연결, 삶의 보람(生きがい) 등으로 나타난다. 일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고, 사회적 관계를 지속하며,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집에 있는 것보다 일하는 편이 더 건강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여기에서 ‘일’은 단순히 임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을 잃을 때 가장 빠르게 사회로부터 멀어진다. 일본 사회는 오랜 고령화의 경험 속에서 '노년의 역할 상실이 곧 사회적 손실'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한 듯하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정부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재직 노령연금 제도를 개편해 연금을 받으면서도 일정 수준까지는 근로소득을 올려도 연금이 크게 줄어들지 않도록 기준을 완화했다. 이는 단순히 노인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다. 연금 감액을 우려해 일부러 근로시간을 줄이는 이른바 ‘일 조절' 현상을 줄이고, 숙련된 고령 인력이 노동시장에 계속 참여하도록 유도하려는 정책의 선택이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국가 전략이 담겨 있다. 초고령사회에서 건강한 고령자가 오래 일할수록 소득세와 사회보험료를 계속 납부하고 소비를 통해 경제활동에도 기여한다. 반대로 노동시장에서 조기에 이탈할수록 의료와 돌봄, 복지에 대한 사회적 지출은 더욱 빠르게 증가한다. 다시 말해 건강한 노인의 지속적인 사회 참여는 국가 재정의 부담을 완화하고, 현역 세대가 부담해야 할 사회보장 비용의 증가 속도를 늦추는 데 기여한다. 일본이 '생애현역(生涯現役)'을 강조하는 이유는 개인의 행복을 넘어 국가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를 이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사회'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에게 노동은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으며, 전문직과 육체노동자 사이의 노후 격차도 확대될 수 있다. 오래 일하는 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그럼에도 일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 역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그러나 한국의 논의는 여전히 연금을 얼마나 지급할 것인가, 정년을 몇 살까지 연장할 것인가에 머무르는 사례가 많다. 물론 이러한 논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가오는 사회를 준비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70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설계하고 있는가. 일본에서 만난 많은 시니어들은 단순히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총장은 교장이 되었고, 기업가는 새로운 창업가가 됐으며, 은퇴한 직장인은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다시 사회와 연결돼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임금보다 자기가 여전히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이었다.
성인교육학은 노년을 생애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배우고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또 하나의 발달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초고령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고용 정책이 아니다. 은퇴 이후에도 새로운 역할을 배우고, 평생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에 환원하며, 세대 간 지식과 경험을 연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평생학습 체제와 사회참여 시스템이다.
초고령사회의 핵심 과제는 노인을 얼마나 부양할 것인가가 아니라 노인이 어떻게 계속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있다. 건강한 노인은 더 이상 복지의 대상만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다. 그들이 더 오래 배우고, 더 오래 사회와 연결될수록 개인의 삶의 질은 높아지고, 국가의 생산성은 유지되며, 세대 간 부양 부담도 완화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초고령사회의 해법을 연금과 복지에서 찾는다. 물론 안정적인 사회보장제도는 반드시 갖춰야 할 사회안전망이다. 그러나 일본이 먼저 경험하고 있는 초고령사회는 또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초고령사회의 핵심 자원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힘은 평생학습이다.
사람의 수명은 의학이 연장하지만 사람의 역할은 교육이 연장한다. 초고령사회에서 평생학습은 더 이상 개인의 교양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배우고, 사회와 다시 연결되며, 축적된 경험을 다음 세대와 나누게 하는 사회의 기반이다. 평생학습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넘어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전략이 되어야 한다.
초고령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오래 일하는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다시 배우는 능력이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배움의 시작이어야 한다. 이제 한국도 '언제 은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회를 넘어 '은퇴 이후 무엇을 배우고 어떤 역할로 다시 사회와 연결될 것인가'를 준비해야 한다.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진 만큼 사회에서 하는 역할도 함께 길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평생학습의 새로운 사명이며 일본이 먼저 경험하고 있는 초고령사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신현정 중부대학교 교수(교육학·일본어 전공)
신현정 중부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