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 외화채권 발행 연구 용역 착수…기금 운용 독립성 훼손 비판
“빚내서 환율 막나” 가입자 불안 고조…‘수익·안정’ 원칙 흔들
지난주,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가슴이 철렁할 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핵심은 ‘국민연금 외화채권’이라는 낯선 말이다. 국민연금이 스스로 외화 빚을 내서 해외투자를 하도록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국민연금이 외화채권을 발행해 해외 투자 자금을 직접 마련하면 국내 환율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다.“빚내서 환율 막나” 가입자 불안 고조…‘수익·안정’ 원칙 흔들
매달 꼬박꼬박 연금을 내는데 국민연금이 빚을 낸다니, 내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을지 불안과 불신이 싹튼다.
‘국민연금 외화채권’은 우리에게 낯설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어서다. 외화채권은 돈을 빌려주는 금융회사 쪽에서 본 말이다. 돈을 빌리는 국민연금 처지에서는 엄연히 ‘외화 빚(채무)’이다. 국민연금의 주인인 가입자 눈높이에서도 외화 빚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최근 2200만 명에 이른다. 국민의 절반, 사회 활동을 하는 성인 남녀 절반 이상이 국민연금을 매달 내고, 또 연금을 받으며 노후 생계를 이어간다.
국민연금 기금은 빚이 없고, 장기 투자를 원칙으로 한다.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을 굳이 빚으로 본다면 ‘연금 부채’가 있을 뿐이다. 그만큼 안정적으로 굴려야 한다는 뜻이다.
환율 방어 위해 ‘연금 독립성’ 훼손하나
지난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경제장관 간담회가 열렸다. 치솟는 원·달러 환율에 대응할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하고, 하준경 대통령실 경제성장수석 등이 참석했다. 여기에 산업통상자원부 정책실장과 보건복지부 제1차관도 자리했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 주무 부처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이 달러·유로 등 외화표시 채권을 해외 투자자에게 발행해 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복지부 관계자는 장단점과 발행 형식, 시기를 살피고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국민연금법 개정까지 추진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미 외화 빚을 내는 방안을 깊숙이 검토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심지어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도 기자간담회에서 “연기금이 환율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환율 변동이 연기금 운용에 미치는 영향도 큰 만큼 새로운 경제 환경에 맞는 운용 방식을 고민할 때”라며 외화채 발행을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정부 쪽 발언은 “고환율과 외환시장 불안 상황에서 국민연금도 제 몫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모인다. 순전히 정부나 정권의 논리다. 어디에도 가입자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걱정은 없다.
환율 방어에 국민연금이 동원된 모양새다. 국민연금이 빚을 내면 이자를 물고 손실을 볼 수도 있는데, 이런 문제는 뒷전으로 밀린 느낌이다.
국민연금이 외화표시 채무증권을 발행해 외화를 마련하고, 이 돈으로 해외투자를 하라는 속내일 테다. 국내에서 원화를 달러로 바꾸지 않아 환율상승을 부추기지 않겠다는 발상이다. 치솟는 환율을 방어하려는 고육지책쯤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 외화 빚 발행이 현실이 될까 두렵다. 한번 물꼬를 트면, 국민연금의 외화 빚은 계속 늘어날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부나 정권 필요에 따라 외화 빚을 더 발행하라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국민연금은 국민 개개인의 노후를 보장하는 마지막 보루다. 그 노후 보장이 흔들리면 국민의 삶과 복지도 위태로워진다.
빚 내서 투자? ‘안정성’ 최우선 원칙 위배
돈(예산)에 관한 한, 정권이나 정치인은 목적에만 맞으면 손실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이 앞서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인은 이익이 나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손실이 나도 세금은 늘 화수분이고, 이마저도 모자라면 국채를 발행하면 된다고 여긴다. 훗날 부작용이 생기거나 파탄이 나도 책임지는 일이 거의 없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국민연금은 우리의 피와 땀이고, 노후 생명줄이다. 아무리 정부나 정권이라도 국민연금이 해외에서 빚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 설사 외화 빚을 내겠다고 건의하더라도 거부해야 마땅하다.
굳이 외화 빚을 내게 한다면, 국민연금 빚으로 환율을 방어하려 한다는 불안과 불신만 키울 뿐이다. IMF 외환위기 시절, 종금사들이 저금리의 외화 빚을 내 운용하다, 고환율과 만기상환 독촉에 모두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다.
환율 안정이 목적이라면, 환율이 안정될 때까지 해외투자에 필요한 외화는 해외에서 조달하는 게 좋겠다고 권고하면 그만이다. 당분간 환율이 안정될 때까지 해외투자 비중은 줄이고, 국내투자 비중을 늘리면 되는 일이기도 하다.
해외투자 자산 중 만기가 됐거나 수익이 많이 난 채권이나 주식을 팔아서 재투자하면 된다. 또한, 만기가 된 해외투자 자산을 국내로 들여오게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국민연금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환율이 위험하다면, 그것은 오롯이 환율을 관리하는 한국은행과 정부의 몫이자 책임이다. 환율이 급박한 상황이라면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되묻고 싶다. IMF 외환위기 때를 보는 듯하다. 위기가 닥치기 전부터 해외 기관, 전문가, 학자들이 숱한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 기초 체력(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말뿐인 장담(립서비스)만 늘어놓다 진짜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국민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감시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노후 연금 자산은 내가 지킨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훗날 국민연금 기금이 일찍 바닥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지금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은퇴했거나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지 못한다.
황상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h1234@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