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그러나 그 규모를 계산해보면 이 사은품은 단순한 기업 마케팅의 범주를 넘어선다. 대한민국 초고속인터넷과 IPTV 가입자는 2000만 가구를 넘는다. 3년 약정 주기를 고려할 때 매년 약 700만 가구가 신규 가입이나 재약정을 맺는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정한 경품고시제 상한선인 가구당 40만 원으로만 계산해도 연간 2조 8,000억 원에 이른다.
실제 현장에서 60만 원 이상의 고액 사은품이 오가는 현실을 감안하면, 매년 3조 원을 웃도는 자금이 사은품 형태로 가계에 유입되고 있다. 이 중 약 40%인 연간 1조 2,000억 원 상당의 구매력이 대형마트와 백화점 상품권 형태로 유입된다고 가정해보자. 소비자는 "공짜로 생긴 상품권이 있으니 이번 달 장은 대형마트에서 보자"며 발길을 돌리지만, 그 순간 골목상권이 입는 타격은 결코 작지 않다.
지역 승수효과의 왜곡과 소득 역외유출
경제학에서 현금이나 상품권 같은 유동성은 지역사회 내에서 소비될 때 '지역 승수효과(Local Multiplier Effect)'를 일으킨다. 주요 경제 연구기관의 데이터에 따르면,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에서 소상공인에게 쓰인 자금의 승수효과는 약 1.5배에서 1.8배에 달한다.
만약 이 1조 2,000억 원이 온누리상품권이나 지역화폐 형태로 동네 가게나 전통시장에서 쓰였다면 어땠을까. 소비자가 동네 식당이나 과일가게에서 쓴 돈은 식당 주인의 재료비로, 재료비는 다시 동네 방앗간과 도매시장 매출로 이어지며 전국적으로 2조 1,600억 원에 달하는 경제 파급 효과를 창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통신사 사은품으로 뿌려진 대형마트 상품권은 이 흐름을 정반대로 바꾼다. 소비자의 손을 거쳐 대형마트 카운터로 들어간 자금은 유통 대기업 본사로 집중되며 '소득 역외유출'로 이어진다. 대형마트에서의 승수효과는 1.0배 미만으로 수렴하며, 지역 상권 내 재순환 효과는 사실상 사라진다. 결국 대기업 간의 결합 마케팅이 '사적 거래'라는 이름 뒤에 숨어, 골목상권으로 흘러 들어갔어야 할 2조 1,600억 원 상당의 부가가치 창출 기회를 무색하게 만드는 셈이다.
유통 정책의 모순과 이중 잣대
진짜 문제는 정부 유통 정책의 모순에 있다. 정부와 국회는 골목상권과 소상공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형마트의 일요 의무휴업을 강제하고 새벽배송의 영업을 제한해 왔다. 공공성과 상생이 기업의 영업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형마트의 문을 닫게 만드는 것은 골목상권 침탈이고, 대형마트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연간 1조 원 넘게 무료로 살포해 소비자를 몰아주는 것은 정당한 사적 거래인가?
한쪽에서는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며 대형마트의 손발을 묶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대형마트로 소비를 유도하는 조 단위의 결합 마케팅을 민간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하는 것은 뚜렷한 이중 잣대다. 이런 모순이 계속된다면 시장에서 합리적인 의문과 반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사적 거래와 소비자 편의가 그토록 중요다면, 대형마트 규제 역시 '사적 거래 제한'이라는 이유로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는 매년 수천억 원의 세금을 들여 온누리상품권과 지역화폐 발행을 지원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한다. 세금으로 겨우 골목상권에 숨통을 터놓고는, 사적 거래라는 사각지대에서 터져 나온 조 단위의 마케팅 자금이 그 온기와 승수효과를 상쇄해 버리는 형국이다.
글을 맺으며
통신사의 사은품 자체를 규제하거나 금지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연간 조 단위의 자금이 이동하며 유통 생태계의 균형을 왜곡하고 있다면, 최소한 대기업 간 결합 마케팅에 상생의 의미를 더하거나 지역화폐 및 온누리상품권 등 골목상권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선택지에 포함하는 정책적 유도책을 마련해야 한다.
진정한 규제의 합리화란 기업의 손발을 묶는 탁상행정이 아니라, 시장 전체의 공정한 생태계를 바로 세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통신 대기업과 유통 대기업 간의 거대한 결합 마케팅이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한, '골목상권 보호'라는 정부의 구호는 허울뿐인 약속에 그칠 것이다.
이제 정부와 정치권은 규제의 칼날을 엉뚱한 곳에 겨누는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왜곡되는 조 단위의 유통 자금이 지역사회와 소상공인의 숨통을 틔우는 선순환의 마중물로 스며들 수 있도록 과감한 정책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연희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회장>
엄정권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astoday@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