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 중국에 반도체 장비 유지·보수를 중단해 달라는 미국 정부의 요구를 사실상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로이터 통신이 7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 정부는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요구에 대한 명시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의 공식 성명에 따르면 국익을 고려해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유지·보수 서비스를 줄여나가고, 앞으로는 이를 중단할 것임을 시사했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로이터는 “네덜란드의 결정은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중국에 좌절을 안기게 될 것”이라며 “중국이 앞으로 ASML 반도체 장비를 교체하기가 불가능해지고, 유지·보수가 없으면 결국에는 고장이 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이런 결정으로 네덜란드의 최대 기업인 ASML이 본부를 해외로 이전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뤼터 총리 정부의 노력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로이터가 강조했다.
뤼터 총리는 지난달 27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인위적으로 기술 장벽을 만들고, 산업과 공급망을 차단하는 것은 분열과 대립을 초래할 뿐"이라고 말했다고 중국중앙TV(CCTV)가 보도했었다. 시 주석은 "중국이 네덜란드로부터 고품질(첨단) 제품 수입을 확대할 의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뤼터 총리는 2006년 취임해 네덜란드 역대 최장수 총리로 재직 중이나 지난해 7월 내분을 이유로 연립정부를 해산하고, 정계 은퇴를 전격 선언했으며 차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으로 내정됐다.
미국 상무부 수출통제 담당인 앨런 에스테베스 차관은 8일 네덜란드를 방문해 정부 고위 당국자들과 ASML 관계자들을 만나 ASML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서비스 문제를 논의한다. 네덜란드는 현재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ASML 등 자국 기업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수출통제 전에 수입한 장비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ASML이 반도체 장비의 유지와 보수에 필요한 서비스도 제공하지 말 것을 요구해 왔다. 미국은 또 네덜란드 기업이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지 못하는 중국 반도체 공장 명단에 다른 중국 공장을 추가하려 한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ASML은 글로벌 노광장비 시장에서 독보적인 업체다. 노광장비는 극자외선(EUV) 등을 이용해 반도체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새겨넣는 데 쓰는 장비로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설비다.
그러나 중국은 네덜란드 기업 ASML의 최첨단 EUV 장비 없이 5나노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술에 진전을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나우라테크놀로지그룹이 반도체 기판에 회로 패턴을 새겨넣는 리소그래피(Lithography)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지난달부터 시작했다고 지난 1일 보도했다. EUV 장비 수입이 막힌 중국은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수출통제 조치 강화를 우려해 최근 수년간 심자외선(DUV) 장비를 미리 대량 구매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달 28일 ASML의 '국외 이탈'을 막으려고 예산 25억 유로(약 3조7000억원)를 긴급 동원한 대책을 발표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ASML 본사가 있는 에인트호번 지역의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내용 등이 담긴 이른바 '베토벤 작전'의 세부 계획을 공개했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의 기업도 중국에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를 팔지 못하도록 규제를 확대할 것을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최근에 미국 정부가 현재 시행하는 중국에 대한 독자 수출통제를 동맹국 기업이 포함된 다자 체제로 확대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SIA는 미국 기업들이 수출통제 대상으로 명시하지 않은 품목이라도 첨단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면 중국에 일절 수출할 수 없고, 이미 판매한 장비에 대한 지원 서비스도 제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일본·한국·대만·이스라엘·네덜란드의 외국 경쟁사들은 품목별 수출통제(list-based control) 대상이 아닌 장비를 중국의 첨단 반도체 공장에 수출할 수 있고, 관련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고 SIA가 지적했다.
국기연 글로벌이코노믹 워싱턴 특파원 ku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