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가 지난 13일 서방 국가 최초로 매우 포괄적인 인공지능(AI) 규제 법안(AI Act)을 통과시켰다. 이는 아무런 규제 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생성형 AI 및 관련 업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EU의 AI 규제법은 산업계 전반의 핵심 기술로 급부상한 생성형 AI의 위험성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데이터 수집이나 AI 모델 학습 등 기술 개발 과정에서 투명성을 강화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이에 따라 EU 역내에서 자율주행·의료장비 등 ‘고위험’ 분야에서 AI 기술을 개발하거나 출시하려는 기업은 사용한 해당 데이터의 원본과 학습 과정 등을 당국에 공개해야 한다.
오픈AI의 챗GPT나 구글의 제미나이 등 생성형 AI를 통해 생성된 콘텐츠는 ‘AI가 제작한 콘텐츠’임을 명시해야 한다. 또 저작권 보호를 위해 AI 기업들은 불법적인 콘텐츠의 생성을 막을 수 있도록 AI 설계 과정부터 방지 조항 및 기술을 넣어야 한다.
무단으로 인종·연령·성별 등 기본 개인정보와 개인 구별이 가능한 생체 정보의 무단 수집도 금지된다. 특히 종교·정치적 성향·성적 지향 등 개인의 세부적인 특성이나 행동 등을 데이터화하고 분류하는 ‘사회적 평가(소셜 스코어링)’나 사람들의 ‘감정’을 해석하기 위한 AI 사용은 최고 위험 수준으로 정하고 전면 금지한다.
생성형 AI는 학습에 사용하는 데이터의 양과 종류가 많을 수록 더욱 인간에 가깝게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사용 가능한 데이터의 종류를 법적으로 제한하는 이러한 AI 규제법은 생성형 AI 기술과 이를 개발·학습·사용하는 기업들에게 커다란 족쇄나 다름없다. 그만큼 AI의 성장 가능성과 활용 범위도 제한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정되고 제한된 데이터만으로 더 높은 수준의 AI를 개발하려면 그만큼 AI의 기초 설계 과정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된다. 이는 기술이나 자본이 빈약한 AI 스타트업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해 관련 산업의 성장 및 발전 자체를 저해할 수 있고, 혁신적이며 업계 파급력이 큰 파격적이고 새로운 AI 기술의 등장을 힘들게 한다.
실제로, EU 역내에서 AI 산업이 가장 활성화된 주요 회원국 프랑스와 독일은 당장 자국의 유망 AI 스타트업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며 이번 AI 규제법에 강하게 반발해왔다.
하지만, EU가 일부 반발과 역내 AI 산업 발전 저해 우려에도 불구하고 AI 규제법을 통과시킨 배경으로는 AI 업계에서 급격히 몸집을 불리고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미국의 거대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부 및 국가 차원에서 미국의 거대 빅테크 기업들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규모나 영향력 등에서 상대적으로 밀리는 역내 관련 기업들이 제대로 경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AI 산업 주도권을 통째로 미국에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 산업은 더 많은 데이터와 방대한 컴퓨팅 자원을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즉 기업의 규모가 클 수록 유리한 산업이다. 미국의 AI 빅테크 기업에 맞설 만한 역내 기업이 없는 EU의 우려가 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러한 우려는 이번 AI 규제법에 앞서 EU가 통과시킨 ‘디지털 시장 법(DMA)’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DMA는 시장 지배적 위치를 가진 거대 기술 기업을 ‘게이트키퍼’로 분류하고, 이들이 소규모 기업을 억누르거나 사용자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반경쟁적 관행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골자다.
DMA의 첫 적용 대상은 알파벳(구글),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바이트댄스(틱톡) 등 6개 기업이다. 이 중 무려 5개 기업이 미국이고, 유럽 기반 기업은 하나도 없다. 이는 EU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역내 잠식을 얼마나 우려하고 있는지를 반증한다.
같은 이유로, EU의 AI 규제법이 국내 관련 기업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을 전망이다. 국내서도 네이버, 카카오 등 기술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AI 산업이 성장하고 있지만, 이들이 유럽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EU가 DMA에 이어 AI규제법을 서둘러 도입하는 취지는 현재 AI 시장에서 미국 빅테크 기업들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한국 시장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용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pch@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