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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그래도 가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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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을은 온다 / 백승훈 시인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남녘에선 극한호우로 물난리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겨우겨우 뜨거운 여름 더위를 벗어났나 했는데 이번엔 가을장마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모양새다. 그런가 하면 멀리 네팔에선 빙하홍수로 수천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재난을 겪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먼 미래의 일로만 여기던 기후 위기가 우리가 마주한 뼈아픈 현실이란 걸 깨닫게 해준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낭만을 떠올리기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너무도 가혹하기만 하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던 폭염과 숨 막히는 열대야, 극한호우까지 얼마나 더 견디고 버텨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면 우울감이 습한 바람처럼 온몸을 휘감아온다.
그래도 여름을 견뎌낸 대지와 거칠었던 여름의 터널을 견뎌낸 숲은 꽃보다 빛나는 열매를 내달고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 있음을 내게 알려준다. 세찬 비바람도 끝이 있게 마련이니 그 고난의 시간을 잘 견뎌낸 나무들이 내단 열매들은 사랑스럽고 어여쁘다. 비바람에 푸른 감들을 툭툭 떨구던 감나무의 감들이 어느새 조금씩 붉은 빛을 띠어간다. 거기에 반해 여름내 날씨 탓이나 하며 하릴없이 에어컨 주변이나 맴돌던 나 자신은 얼마나 한심한가. 이런 생각이 들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가을은 오고, 들녘에는 추수할 벼들이 익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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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올여름 새로 생긴 취미가 펜 드로잉 어반 스케치다. 더위에 핑계를 대고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보니 딱히 소일거리를 찾다 생긴 취미인데 그림 그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화실이나 문화 교실에 가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독학으로만 하다 보니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다. 처음엔 호기심에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가며 호기롭게 몇 장 그렸을 땐 제법 괜찮은 취미를 찾았다고 의기양양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서툰 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고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에 은근히 짜증도 났다. 동영상을 보면 펜이 몇 번 스치기만 하면 멋진 풍경이 그려지는데 선 하나 마음먹은 대로 그어지지 않는 나의 손이 원망스러웠다.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나는 종종 집에서 멀지 않은 원당샘 가에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를 찾아가곤 한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무려 500년을 훌쩍 넘는 노거수로 서울시 보호수 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껏해야 백 년 남짓한 수명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긴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따뜻한 위안을 준다. 그 긴 세월을 견디는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봄마다 새잎을 내고 여름엔 푸른 그늘을 드리웠을 것이다. 그 긴 세월을 견디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 가만히 나무의 시간을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나무가 처음부터 멋스러운 품위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작은 묘목이 자라 저토록 멋지고 품위 있는 수형을 갖추기까지 5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림을 시작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음에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투정이나 해댔으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나무는 나를 비난하지도 나무라지도 않는다. 다만 말없이 자신의 그늘로 품어줄 따름이다. 상처가 아무는 데에도, 실력이 느는 데에도 필요한 것은 시간임을 나무는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는 듯하다.

늘 견디기 힘든 게 삶이긴 해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와 우리에게 넉넉한 품을 내주고 있다. 이 비 그치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들녘엔 황금빛 물결이 출렁일 것이다. 나무처럼 묵묵히 여름을 견뎌낸 이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래도 가을은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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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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