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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빈 발전소 자리에 무엇을 세울까?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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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형모듈원자로(SMR)는 먼 미래에나 상용화될 것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증대,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확대 등에 따른 전력 수요 급증으로 SMR이 실전에 투입될 시기가 대폭 앞당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미국에서는 대규모 부하의 계통 연계 지연, 발전소와 데이터센터 간 직접 연결(Co-location), 비용 부담과 전력망 신뢰성을 둘러싼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의 논쟁이 치열하다. 막대한 송전망 건설 지연과 비용 부담으로 인해 빅테크 기업들은 이제 전력을 사서 쓰기만 하던 데서 자체 발전원을 확보하는 데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 같은 전력 수요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한국에서 석탄화력발전은 정부의 무탄소 전환 기조에 따라 단계적으로 퇴출되고 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LNG 가스발전 역시 전환기의 다리(Bridge) 역할을 할 뿐, 화석연료라는 근본적 한계로 인해 지속가능한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무탄소 전원으로서 재생에너지는 대폭 확대되어야 하지만 대규모 첨단 산업단지와 24시간 가동되는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고품질의 기저 전력 공급을 단독으로 담당하기에는 출력 변동성이라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런데 석탄화력을 철거한 곳에는 전력망과의 계통 접속점, 대규모 송전설비, 냉각 용수 인입시설, 항만·물류 접근성 그리고 숙련된 발전 전문인력과 지역사회의 산업 역량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다. 그러한 기반을 재료로 삼아 '차세대 무탄소 전원 실증과 에너지 전환 플랫폼'을 탄생시켜야 한다.
SMR은 크게 세 가지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축이다.
첫째, 산업단지와 AI 데이터센터를 위한 분산형 고품질 전원이다. 송전망 부족과 발전원 직접 확보 요구가 거세지는 상황에서 수요처 인근에 위치해 안정적 전력을 직접 공급하는 분산에너지의 핵심 자원이 된다.

둘째, 앞서 언급한 노후 화력발전 부지의 재활용이다. 이미 구축된 국가 인프라 위에 SMR 실증 거점을 마련하는 것은 경제성과 속도 면에서 가장 뛰어난 선택이다.

셋째, 대양과 북극해를 누빌 원자력 추진 선박의 차세대 동력원이다. 다양한 해운 탈탄소 옵션 중에서도 대양과 북극항로의 장기 무급유 운항과 무탄소 동력이라는 면에서 SMR은 매우 유력한 선택지다. 이는 원전 산업과 조선·해양 산업이 만나는 전혀 새로운 글로벌 시장의 개막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전환을 실행할 정책적·산업적 동력도 구체화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두산에너빌리티가 글로벌 SMR 설계사들과 손잡고 주기기 제작을 전담하는 'SMR 파운드리' 거점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정책적으로도 장기·고위험 에너지 전환 사업을 수행할 대규모 투자 역량 확보를 위해 발전 5사 통합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기술 개발과 대규모 투자, 실증 사업에 속도를 낼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글로벌 파운드리 역할이나 단순 부품 공급 기지(Vendors)에 머물지 않으려면, SMR을 선박에 탑재하기 전에 "어디에서 먼저 검증할 것인가"라는 핵심 과제를 풀어야 한다. 해상 운항 환경에 적용하기에 앞서 안전성, 진동, 열관리, 정비성, 규제체계에 대한 철저한 육상 실증은 필수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육상 실증 거점의 자격 조건이 도출된다. 실증 기지는 제조 인프라, 조선·해양 산업, 항만, 대규모 산업 전력 수요 그리고 발전 인프라와의 연계 가능성을 모두 갖춘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엄격한 조건들을 종합해 볼 때 자동차·조선·석유화학 인프라와 산업 전력 수요, 항만을 모두 품고 있는 울산은 국가 차원의 '인테그레이션(Integration)과 실증의 기지'로서 최우선 고려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특정 지역에 연구센터를 유치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육상 SMR 실증→산업단지·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선박용 SMR 고도화→원자력 추진 선박 탑재→글로벌 완제품·시스템 수출'로 연결되는 국가적 산업 생태계를 어디에서 완성할 것인가의 문제다.

SMR을 둘러싼 오랜 이념적 찬반 논쟁의 시대는 지났다. SMR은 AI 시대의 전력 솔루션이자 분산에너지의 핵심이고, 조선·해양 산업의 차세대 엔진이자 국가 전략 수출산업이다. 배에 싣기 전에 땅에서 먼저 돌려보고, 세계 시장에 팔기 전에 우리 산업 현장에서 먼저 써보아야 한다. 통합된 역량과 산업적 인테그레이션을 통해 실증 시간을 당기고, 설계·제어·안전규제·선박 적용 기술 전반의 지식재산권(IP)을 조기에 선점하는 자만이 미래 에너지 주권을 쥐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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