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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달 밝은 가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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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가을밤에. 백승훈 시인
달이 밝다. 밤바람이 좋아서 산책을 나섰다가 허공에 걸린 보름을 갓 지난 둥근 달을 보았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아도 달밤이 있어 인류는 생각하게 됐다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렸다. 고향에서 보던 달처럼 낭만적이진 않아도 빌딩 사이로 떠오른 도회지의 달도 그 은은한 빛으로 나의 메마른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기엔 부족함이 없다. 은은한 달빛의 마술이랄까. 달을 바라보면 아득히 잊고 있었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자전거를 타고 천변으로 나간 것도 콘크리트 빌딩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달이 아쉬워 온전히 달빛을 즐기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천변엔 산책과 밤 운동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나는 천변에 자전거를 세우고 편평한 돌 위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난히도 뜨겁고 지난했던 여름을 생각했다. 두 번의 입원과 수술 그리고 퇴원 후 이사까지. 수의처럼 입고 있어야 했던 환자복의 촉감과 병원 복도를 오갈 때마다 속을 메슥거리게 하던 소독약 냄새가 달빛에 풀려 강물을 따라 흘렀다. 어디선가 달맞이꽃이 피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달맞이꽃을 생각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달콤한 달맞이꽃의 향기가 느껴졌다. 간절함에는 정말 놀라운 힘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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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젖어 하루까지 소리 없이 흘러가는 밤 강물 곁에서 푸른 어둠과 어둠 위의 살림들인 가로의 불빛까지 흔들리며 흐르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생각하면 세상에 절로 된 것은 없다. 의미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내 모습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지금의 내 모습에 영향을 준 모든 것이 빚어낸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손짓 하나, 말 한마디 내뱉는 일도 허투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수고하지 않았던가. 인생은 생각만으로는 살 수 없다. 몸과 마음 전체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달 밝은 가을밤에 천변에 나앉아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세월을 들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누구의 슬픔이든 기쁨이든 탓하지 않고 공평히 싣고 흐르는 강, 그 강물 위로 뿌려지는 달빛은 부대끼면서도 열심히 살아온 생에 대한 훈훈한 격려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게 인생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폭염과 폭우가 빈번했던 무덥고 지루한 여름을 잘 견뎌 마침내 가을에 이르지 않았던가. 잘 견디고 잘 이겨낸 나 자신의 어깨를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은 밤이다.

퇴원 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이사를 했다. 입원하기 전에 결정된 일이라 미룰 수가 없었다. 서둘러 짐을 옮긴 뒤 일주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정리 중이다. 박경리 선생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했는데 버리고 버려도 아직도 비울 게 너무 많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책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하다”고 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마저 내주는 게 아니라 나무들이 벌레에게 나뭇잎을 내주듯이, 꽃들이 벌이나 나비에게 자신의 꿀을 나눠주듯이 베풀며 살아가는 게 귀하고 값진 삶이 아닐까 싶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음에도 넉넉한 빛을 세상에 골고루 뿌려준다. 달빛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달처럼 살 수는 없다 해도 내가 지닌 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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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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