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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건강한 언어, 건강한 관계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
우리는 언제 ‘언어’를 사용할까?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우리는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배우고, ‘싫어’와 ‘아니야’를 배우고, 벽에 붙은 가나다라마바사를 배우는 것에서부터 지금의 언어 사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편리함을 좋아하는 우리 뇌는 익숙한 것들을 빠르게 인지하고, 예측하지 못한 것들을 처리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을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는 것과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만일 언어가 없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부를 수 없다면, 사과가 과일의 한 종류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사과를 볼 때마다 한참 동안 색을 관찰하고, 향을 음미하고, 만져보고, 잘라보고, 먹어도 되는지를 의심하며 맛을 보고, 내가 탈이 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과 싸우다가 비로소 한 입을 크게 베어 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인지하고, 그 인지한 대상을 기억으로 저장하는 모든 과정이 언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즉 우리의 생각, 사고 역시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활자 언어를 읽고 쓰거나, 음성 언어를 듣고 말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항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같은 언어를 쓰는 집단의 사고방식, 생활양식, 가치관, 집단양심, 나아가 이러한 기준들로부터 파생된 정서와 문화가 모두 담겨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존칭어가 있는 한국말의 경우 ‘예의’를 중시한다는 것, 또 예의를 갖춰야 하는 대상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예의를 덜 갖춰도 되는 대상이 있음을 동시에 말해주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저맥락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서양권의 언어로 된 대화들을 보면 비교적 의사표현이 분명하고, 다소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얘기하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을 직역해보면 우리 정서에는 다소 어색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인들은 실제 대화에서는 “아니요”라는 표현을 그리 많이 쓰지는 않는 것 같다. 고맥락 문화권에 있는 우리나라는 나의 의사를 표현하기에 앞서 상대를 배려하고,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눈치를 보는 편이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글자들이 만나 어떠한 메시지나 가치들을 담을 수 있는 조합으로 탄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언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개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보면, 우리의 언어체는 결국 어린 시절 자신에게 언어를 가르쳐준, 귀여움을 제외하면 생존을 위한 무기가 아무것도 없던 시절, 우리의 생존을 책임지는 부모님의 언어체를 대물림 받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왜 그렇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이런 질문을 많이 하면서 살아왔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반면 “그러지 마라고 했지!”라는 비난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도 명명할 수 없는 어떤 엄격한 기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고 타인을 평가하거나 사춘기가 오면서부터 이에 대한 반항의 시도들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태어나서 7세까지의 경험들이 무의식에 저장되고, 이 무의식이 평생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얘기한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이 곧 생존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부모님의 가치관, 사고방식, 신념 등이 자신에게도 절대적인 기준처럼 학습되는 것이다. 이 기준은 결국 내가 많이 들은 언어체, 즉 내가 대해진 방식에 의해 무의식에 저장되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 역시도 그들의 부모를 통해, 조부모는 또 그 위의 부모를 통해서 계속 대물림 받고, 그 대물림을 각자의 삶에서 처리해 나가는 과정과 경험들이 덧붙여져 대대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언어는 조금 더 폐쇄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언어는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 많이 노출돼버린 언어체는 내가 나와 소통하는 언어가 되고, 또 내가 타인을 대하는 언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결국 나의 언어를 관찰하다 보면, 내가 옳다고 믿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들이 반영돼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 기준은 나의 것이 아닌 대물림된 기준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나이를 먹고 사회적 스킬을 습득하면서 타인을 대하는 언어는 조금 더 관대해지고, 부드러워질 수는 있겠으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이러한 괴리가 결국엔 정서적 고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건강한 언어란 무엇일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건강하다’라는 표현을 ‘괴롭히지 않는다’라고 바꿔서 말하고 싶다. 괴롭히지 않는 대상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해서 대화하고 있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스스로에게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며 조롱하고 있지는 않는가? “네가 결국 그 모양이지”라며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는가? “아니야, 어떻게든 잘 될 거야!”라며 무조건적인 낙관을 앞세워 외면하고 있는가? “너무 힘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며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내고 있는가?

먼저 승진한 동료를 보며 속으로는 “저건 그냥 운이야. 분명히 실체가 들통날 거야!”라며 의심과 무시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 부럽다. 나도 최선을 다했는데…. 너무 속상하다”며 솔직하게 감정을 인정할 수 있는가? 준비해 오던 일이 큰 성과를 거두었을 때, 나는 나에게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라며 엄격하고 건조한 인정을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래, 나 정말 잘했어! 정말 고생했어!”라며 다정한 칭찬의 말을 해줄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언어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당신은 당신을 다정하게 대하고, 괴롭히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직면하고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게끔 돕는 언어를 쓰고 있는가?
누구도 괴롭히지 않는 건강한 언어는, 상대와 건강한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 괴롭히지 않는다는 뜻은 우리가 소위 부정적인 감정이라 분류하는 감정들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상대가 방어기제를 발동하게끔 공격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회피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할 수 있게끔 용기를 주는 안전하고 다정한 언어다.

내가 나를 공격하는 언어를 쓰면 나는 나와의 관계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과 사회적으로는 건강한 언어를 쓰고 건강한 관계를 맺으려 애쓴다고 해도, 내가 나와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그 괴리감은 더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반면 내가 나를 대하는 언어부터 건강해지고, 나와의 관계가 변화하면 다른 사람을 대하는 언어도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하기 마련이다.

결국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내가 속한 집단에 소속되는 것이다. 소속되기 위해 애를 쓰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결과적으로 더 큰 소외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욕구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부모님의 기준을 학습하고 수용했던 어린 자아가 나이를 먹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집단에 소속되며,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의 언어를 바꿈으로써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개인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아닐까? 아마 이 세상에 건강한 언어와 정서만을 대물림한 부모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대물림 받은 언어가 무엇이든, 그것을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개인이 가장 큰 성장을 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것이 곧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궁극적으로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의 생존 수단은 관계술인지도 모른다. 직장에서도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힘들어서 그만둔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내가 나와의 관계에서 안전하게 소속되고 관계 맺을 수 있을 때 나를 둘러싼 관계, 내가 속한 집단에서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

지금 관계로 인한 고민이 있다면, 나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내가 타인에게 쓰는 언어와 나 자신에게 쓰는 언어는 어떻게 다른지를 한 번 들여다보기 바란다. 그리고 내가 나와 소통하는 생각의 언어부터 조금 더 다정하고, 안전하게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꾸준히 일기를 쓰며, 나의 일기를 읽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의도적으로 솔직한 표현의 말들, 다정한 인정과 감사의 말들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다.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사소한 의도들이 쌓여 어느새 전혀 달라진 표정을 짓고, 훨씬 건강한 에너지로 관계를 맺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김신혜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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