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너지 위기·호르무즈 충격 연속 강타, 실업자 302만 명으로 12년 만에 최고치 고착
IW 경제연구소 "닷컴 버블 이후 가장 긴 위기"…전문가들, 슈뢰더식 노동시장 개혁 재현 촉구
IW 경제연구소 "닷컴 버블 이후 가장 긴 위기"…전문가들, 슈뢰더식 노동시장 개혁 재현 촉구
이미지 확대보기코로나 팬데믹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에너지 위기, 그리고 최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유가 급등까지, 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충격이 밀려드는 '연속 위기'가 유럽 최대 경제국 독일을 7년째 짓누르고 있다.
독일 자동차 전문 매체 빌트(Bild)는 지난 18일(현지시각) 경제 주간지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의 수석 경제학자 베르트 뤼루프(Bert Rürup)가 "물가 상승을 반영한 실질임금이 2019년 수준을 밑돌고 있어, 많은 시민이 지난 몇 년간 더 가난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임금은 오르고 구매력은 줄고…7년째 이어진 '착시의 함정’
숫자로만 보면 독일의 임금은 분명 올랐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독일의 월평균 세전 임금은 4701유로(약 811만 원)로 2023년의 4479유로보다 늘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물가를 걷어낸 '명목임금'일 뿐이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독일을 강타한 에너지발(發) 인플레이션이 임금 인상분을 고스란히 앗아간 탓에, 물가 상승을 반영한 실질임금은 아직 2019년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구매력 역주행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난 7년간의 충격을 차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독일 경제를 -3.7%라는 통일 이후 최악의 성장률로 끌어내렸다.
이후 반등에 나서던 독일 경제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다시 흔들렸다. 2023년에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9%를 기록하며 경기 수축이 본격화됐고, 2024년에도 -0.5%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갔다.
유가 상승이 이 문제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후 유류비가 폭등하면서 물류업계와 일반 소비자 모두 주유소에서 직격탄을 맞고 있으며, 항공유 부족은 여름 성수기 항공편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쾰른 독일경제연구소(IW)의 미하엘 그뢰믈링(Michael Grömling) 연구위원은 지난 18일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수년간 한 경제 충격에서 다음 충격으로 몽유병처럼 걸어왔고, 잠깐씩 보이던 회복의 빛도 사라졌다.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에너지 위기로 이어진 충격의 연속은 전례 없는 수준이다. 비슷한 장기 위기는 2000∼2005년 닷컴 버블 붕괴 때가 마지막이었다.
당시는 5년의 침체였지만, 지금은 성경의 표현처럼 7년째를 맞고 있다." 연방정부는 호르무즈 사태를 반영해 올해 성장 전망치를 추가로 낮출 가능성이 있다.
실업자 302만 명…수치 뒤에 숨겨진 공공 부문의 착시
하지만 1년 전과 비교하면 5만4000명이 더 많고, 봄철 계절적 효과를 제거한 계절조정 수치는 전달과 다를 바 없다.
실업률은 6.4%로 2014년 이후 12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 이어지고 있다. 안드레아 날레스(Andrea Nahles) 연방노동청장은 "3월에는 통상 봄철 취업 활성화가 시작되지만, 올해는 그 기세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치 이면의 구조가 더 문제다. 민간 기업이 일자리를 줄이는 동안 공공 부문 고용만 늘어나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 대부분이 세금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공공 영역에 쏠려 있다.
폴크스바겐(Volkswagen)은 2030년까지 독일 내 3만5000개, 보쉬(Bosch)는 2만2000개, 아우디(Audi)는 2029년까지 7500개의 일자리를 줄이겠다고 밝혔다.
IW의 최신 설문조사에서는 독일 기업 3곳 가운데 1곳이 올해 안에 인력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응답했다. 이에 대해 독일경영자총연합회(CEA) 라이너 둘거(Rainer Dulger) 회장은 "300만 명의 실업자는 최근 몇 년간 개혁을 이행하지 않은 부끄러운 결과"라고 직격했다.
관료주의가 경쟁력을 갉아먹는다…"슈뢰더 모델 다시 꺼내야"
그렇다면 독일은 이 하강 곡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뢰믈링 연구위원은 처방으로 '슈뢰더 방식'을 제시했다.
사민당(SPD) 게르하르트 슈뢰더(82) 전 총리가 집권 당시 추진한 '아젠다 2010' 노동개혁이 2000년대 중반 독일을 다시 성장 궤도에 올려놓고 실업자를 대폭 줄이는 데 성공한 전례가 있다.
그뢰믈링 연구위원은 "오늘날도 그때처럼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동시장 유연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뢰믈링 연구위원은 이와 함께 과도한 관료주의도 집중포화했다.
그는 "독일 기업들은 복잡한 정부 규정을 지키는 데만 매달리는 인력을 상당수 고용해야 한다"며 "이 관료주의 비용이 기업 이익을 갉아먹고, 제품 가격을 끌어올려 독일의 국제 경쟁력을 무너뜨린다"고 말했다.
뮌헨 ifo 경제연구소의 클레멘스 푸에스트(Clemens Fuest) 소장도 "정치는 단순히 돈을 빌릴 능력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며 "어렵고 갈등을 수반하는 구조 개혁을 실행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하며, 개혁이 성공한다면 민간 투자가 다시 늘고 새 일자리도 창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회복의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26년 3월 독일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뚜렷한 회복 조짐을 보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6년 독일 성장률을 0.9%로 유지했고, 할레경제연구소(IWH)도 0.8%의 완만한 플러스 성장을 전망했다. 반면 서비스업 PMI는 전달 53.5에서 50.9로 급락해 7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S&P 글로벌 마켓인텔리전스는 "연료 가격 상승과 지정학적 불확실성 확대가 서비스업 경기를 짓누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경제 회복이 올해의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지만, 호르무즈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구조 개혁도 지연되는 한 독일이 닷컴 버블 이후 가장 긴 침체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