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브로드컴과 수백억 달러 계약, 엔비디아 의존 탈피 시도
"대만 생산 멈추면 세계 경제 마비"…'유일 공장' TSMC의 독주와 한계
"대만 생산 멈추면 세계 경제 마비"…'유일 공장' TSMC의 독주와 한계
이미지 확대보기오픈AI가 촉발한 이번 '칩 확보 전쟁'의 규모는 막대하다. AMD와의 계약은 앞으로 몇 년간 6기가와트(GW) 규모의 GPU 생산을 골자로 한다. AMD의 인스팅트 MI450 실리콘을 활용한 1GW 규모의 첫 배치는 2026년 말 시작될 예정이다. AMD는 오픈AI의 요청에 따라 맞춤형 GPU 솔루션을 대량 공급한다. AMD의 진 후(Jean Hu)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번 파트너십이 미래에 수백억 달러의 수익을 가져올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브로드컴과의 계약 규모는 더 크다. 오픈AI는 브로드컴과 10GW 규모의 AI 가속기 및 초고속 이더넷 시스템 구축에 협력한다. 이는 오픈AI의 차세대 데이터센터 간 통신 속도를 크게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이 역시 2026년 하반기에 배치가 시작되어 2029년까지 이어지는 장기 계약이다. 브로드컴은 기존의 IP 블록들을 오픈AI의 사양에 맞춰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칩 설계에 참여하며, 이는 주로 AI 추론 성능 최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칩 업계에서 30년 경력을 쌓은 루마이(Lumai)의 필 버(Phil Burr) 제품 책임자는 이번 계약의 실제 뜻을 분석했다. 그는 오픈AI가 브로드컴의 장비를 "설계"한다는 주장에 대해 선을 그었다. 버는 "브로드컴은 광범위한 IP(지적 재산) 블록과 사전 설계된 칩 부품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며, "본질적으로 고객, 즉 오픈AI가 제시한 사양에 맞게 이미 설계해 둔 블록을 조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브로드컴이 생산할 AI 가속기는 AI 업계에서 '추론'이라 불리는, 즉 이미 훈련된 모델을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버는 "작업 부하를 맞춤화해 전력을 줄이거나 성능을 높일 수 있지만, 이는 AI 산업 전반보다는 오픈AI 자체 성능 향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지적했다.
AI 업계가 칩 개수 대신 기가와트 단위로 이야기하는 이유에 대해, 버는 종종 양측 모두 그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칩이 필요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칩에서 소모하는 1와트의 전력당, 그것을 냉각하는 데에도 약 1와트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오픈AI는 이번 계약을 통해 엔비디아로부터 완제품을 구매하는 것보다 '마진이 적은' 맞춤형 칩을 확보해 비용을 절감하고, 자사 시스템에 최적화된 성능을 얻었다. 버는 "단일 공급업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며 오픈AI가 "공급망의 다양성"을 확보한 점을 가장 큰 이점으로 꼽았다.
공급선 다변화에도…모든 칩은 'TSMC'로
하지만 역설이지만, 오픈AI가 AMD와 브로드컴으로 공급선을 다변화하더라도, 그 실리콘에 어떤 이름이 찍히든 모든 칩은 사실상 한 곳에서 생산된다. 버는 "만약 TSMC가 아니라면 매우 놀랄 것"이라며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AI 칩은 TSMC를 사용한다고 확신한다"고 단언했다. TSMC는 지난 10년간 경쟁자들을 압도하며 전 세계 기술 산업의 최첨단 칩을 공급하는 유일무이한 창구로 자리매김했다.
DA 데이비드슨의 길 루리아(Gil Luria) 매니징 디렉터는 TSMC를 "전체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단일 장애 지점"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TSMC가 "지난 3년간 GPU 생산량을 10배로 늘려야 했던 점을 고려하면" 경이로운 확장을 이뤄냈다고 평가하면서도, "TSMC가 대만에서 생산할 수 없는 재앙 시나리오가 닥친다면, 그 혼란은 AI뿐만 아니라 모바일 기기와 세계 자동차 판매까지 멈춰 세울 만큼 심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TSMC의 독주는 인텔이 고전했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EUV) 기술을 성공하면서 확고해졌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는 물론, 인텔조차 일부 CPU 생산을 TSMC에 맡길 정도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벤저민 C. 리(Benjamin C. Lee) 교수는 "TSMC는 현재 첨단 3나노미터(nm) 공정 기술의 선두주자"라며 "인텔은 파운드리 인터페이스를 완성하지 못했고, 삼성은 수익을 내는 제조 사업을 위한 충분한 고객 기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경쟁 상황을 요약했다. 리 교수는 TSMC의 성공 비결로 "기대되는 성능과 신뢰성을 갖춘 칩을 더 많이 생산해내는", 즉 '높은 수율'과 탁월한 설계 호환성을 꼽았다.
분석 그룹 ARPU 인텔리전스는 "TSMC의 비밀 병기는 수율에 대한 숙련도"라며, 이는 "수십 년간 축적된 공정 개선과 복제 불가능한 깊은 조직적 지식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또한 "애플이나 엔비디아 같은 기업들이 TSMC의 고유한 제조 공정에 맞춰 칩을 설계하기 때문에 '강력한 기술 종속'이 발생한다"며 "(칩) 설계를 다른 공장으로 옮기는 것은 현실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예약 포화'…美·대만 동시 증설 나선 TSMC
전 세계가 TSMC에 의존하면서 공급 병목 현상은 현실화되고 있다. TSMC 매출의 약 75% 이상이 북미 고객에게서 발생한다. TSMC는 2025년 2분기에만 128억 달러(약 18조3000억 원), 3분기에는 147억6000만 달러(약 21조1700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TSMC의 웨이저자 회장 겸 CEO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자사의 생산 능력이 "매우 빠듯하며" 당분간 이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올해 초 엔비디아는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 금지 조치 때문에 H20 AI 칩 주문을 취소했다가, 금지가 해제된 후에도 TSMC의 생산 일정을 확보하지 못해 최소 9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는 TSMC가 '예약 포화 상태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ARPU 인텔리전스는 "TSMC는 실수를 용납할 여유가 없다"며 "2024년 4월 화롄(花蓮) 지진 당시에도 웨이퍼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다"고 지적했다.
TSMC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만과 미국에서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2028년 1.4nm 칩 생산을 목표로 하는 A14 팹(fab) 건설이 곧 시작된다. 이 시설은 2026년에 소비자 기기에 탑재될 2nm 실리콘보다 향상된 속도의 차세대 로직 칩을 생산할 예정이다.
2021년 착공한 미국 애리조나 시설도 속도를 내고 있다. 첫 번째 시설은 2025년 초 4nm 칩 생산을 시작했으며, 지난주에는 애리조나 공장에서 엔비디아의 첫 번째 블랙웰(Blackwell) 웨이퍼가 생산됐다. 당초 3개였던 시설 계획은 6개로 확장됐다. 주목할 점은 당초 미국 시설이 대만보다 '한 세대 뒤처진' 공정을 유지할 계획이었으나, TSMC의 웨이저자 회장이 "미국 시설에 더 투자해 대만과의 기술 격차를 단 한 세대 차이로 좁히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첨단 반도체의 80% 이상이 대만에서 생산되는 현실에서, TSMC의 막대한 투자나 인텔, 삼성의 추격에도 현재의 병목 현상이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최첨단 제조업 분야에서 대만에 대한 전 세계의 의존은 앞으로 수십 년간 기술 산업의 가장 심각한 약점으로 남을 것이며,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