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선택의 자유 있지만 그 책임도 뒤따라
졸장부라고 불릴 인물들의 대표적 행동은 책임 회피와 남 탓을 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Adam)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이브(Eve)를 창조해 주신다. 이브를 처음 본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최고의 사랑 고백을 한다. 이들의 사랑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정도로 강했다. 우리말에도 두 사람의 친밀한 강도를 나타내기 위해 "흉허물이 없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흉이나 허물이 될 일이 없다기보다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허물이 있더라도 용서해줄 만큼 사랑이 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지속되지 못했다.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이 금한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고, 옆에 있던 남편 아담에게도 먹게 한다. 이 상황에서 아담은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자고 설득하거나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도 이브와 함께 선악과를 먹는다. 선악과를 먹은 후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벌거벗고 있는 것이 흉이 되고, 그들은 부끄러워 나무 밑에 숨는다.
하느님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아시고 아담에게 먼저 그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아담은 "하느님이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과일을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명령을 어긴 이유를 이브 탓으로 돌렸다. 여기에 재미있는 상황이 전개된다. 하느님은 아담보다 이브가 먼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이브보다 아담에게 먼저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를 물으신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밝힐 것은 필자는 신학자도 아니고, 선악과 사건의 기독교 교리를 밝히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사건에서 심리학적으로 얻을 수 있는 비유는 무엇인지를 알고 싶을 뿐이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직접 명령하셨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 결과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단호하게 알려주신다. 아마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이브에게 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브도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도 이브가 먼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 먹은 순서와 상관없이 아담에게 먼저 그 이유를 물으셨다. 물론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경위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아담이 어떤 대답을 하기를 바라셨을까?
하느님이 듣고 싶었던 혹은 기대했던 대답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담이 한 대답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당사자다. 그러므로 그만큼 행동에 더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브에게 책임을 미루고 핑계를 대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자세를 원했을 수도 있지 않으셨을까? 만약 아담이 "하느님, 제가 욕망을 이기지 못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하기를 바라셨지 않았을까? 그것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을까?
잘못 저질러도 실수 인정하고 책임질 때 용서받아
애초에 에덴동산에 선악과 자체가 없었다면 아담과 이브가 따 먹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수준의 학생들은 이 점을 지적하면서 하느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속성 중 첫째 중요한 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는 것이다. 그의 존재와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그 자리에 하느님도 계셨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느님의 둘째 중요한 속성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나 다 알 수 있고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비록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지만, 사실 하느님은 전지(全知)하시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미리 알고 계셨을 것이다. 더구나 전능(全能)하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에 못 먹게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덴동산의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금단(禁斷)의 나무를 두고 그 과실을 따 먹을 것을 미리 알고 계셨고, 더욱이 말리지도 않다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 일반적인 해석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체 중 유일하게 타고난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성(理性)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동시에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즉, 선택은 자유를 전제로 하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따 먹거나 따 먹지 않을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고, 동시에 선택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셋째 중요한 속성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도 없이 로봇처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동시에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면 용서(容恕)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처벌을 면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처벌 여부를 막론하고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최초의 인간에게 원했을 것이 무엇인지 추론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있다. '천심'을 의인화해서 이해하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민심은 일반적인 사람의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늘의 마음과 보편적인 사람의 마음은 동일하다고 믿고 있다. 하늘은 잘못을 처벌하지만, 동시에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해 준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졸장부를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의 아담의 행동을 빌려왔다.
평범한 일반인보다 지도층에 더 엄격한 행동의 잣대 적용
졸장부는 한마디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고 교묘하게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욕망에 굴복해 저지르는 실수도 있고, 잘하려고 했지만 나쁜 결과를 초래한 실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신(神)과 대비되는 인간의 본모습이다. 만약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완벽하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을 초월한 신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술 등이 매우 뛰어난 것을 이를 때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모든 인간이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이 저지를 잘못 때문에 영원히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실낙원(失樂園)'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시지 않을까? 천심인 민심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책임을 질 때 사랑으로 용서해주지 않을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고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거나 혹은 핑계를 대는 것은 당당한 행동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졸장부들이 자주 하는 행동일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한 국가를 이끌고 가겠다는 정치인들이 자신이나 가까운 가족의 잘못에 대해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계속 본인은 모르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조차 안타깝게도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도 시정(市井)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처럼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평범한 일반인들보다 더 엄격한 행동의 잣대가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이런 모습이 일반인, 특히 청소년의 가치관에 미칠 부정적 학습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천심인 민심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아량과 포용을 통해 용서해주고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자신이 지도자가 되려는 큰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대장부의 모습을 동시에 기르기를 바란다. 졸장부는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 탓을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천심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