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1990년대 근 10년동안 세계 증시는 정보통신(IT) 혁명이라는 환희 속에서 통신 장비 기업들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시장을 호령하던 루슨트 테크놀로지(Lucent Technologies)와 시스코 시스템즈 등은 매 분기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매출과 영업이익을 발표하며 불멸의 거대 공룡으로 군림했다. 투자자들은 매일 같이 쏟아지는 경이로운 실적 수치에 매료되어 그 성장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화려한 장부상 실적의 실상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매출의 상당 부분이 최종 소비자의 자연스러운 수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급자인 통신 장비 기업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가발전식 착시'였기 때문이다. 인터넷 장비 기업들은 자사의 막강한 자금력과 신용을 동원해 신생 통신 사업자나 인터넷 스타트업들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대출해 주거나 보증을 서주었다. 대출을 받은 신생 기업들은 그 돈으로 다시 공급자의 광장비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장비 공급자가 고객에게 돈을 대어주고 자사 제품을 사게 만드는 이 치명적인 '순환 파이낸싱' 구조를 통해, 기업들은 외부의 실질적인 수요 없이도 표면적인 매출과 이익을 폭발적으로 부풀릴 수 있었다.
이 인위적인 선순환 고리는 인터넷 트래픽의 실질적인 수익화(Monetization)가 지연되면서 순식간에 참극으로 변했다. 대출을 받아 장비를 사들였던 신생 기업들이 연쇄 부도를 맞이하자, 장부상 화려하게 빛나던 대출금은 회수 불가능한 거대한 부실 채권으로 급반전되었다. 매출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한때 세계 최대의 기업이라 칭송받던 루슨트 테크놀로지는 폭락하는 주가 속에서 대규모 해체와 매각이라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닷컴버블의 붕괴는 실질적 현금 창출 없이 자본의 돌려막기로 쌓아 올린 순환 파이낸싱이 가져온 필연적인 저주였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엔비디아(NVIDIA)의 순환 파이낸싱이 주목을 끌고 있다.인공지능(AI)이라는 시대적 화두 속에서 엔비디아가 구축해 놓은 거대한 생태계 역시, 과거 루슨트가 걸어갔던 위험천만한 궤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엔비디아는 생성형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유망 스타트업, 신생 구름 기반 서비스 제공업체(CSP), 그리고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 기업들에 수십억 달러 단위의 벤처 투자를 적극적으로 집행해 오고 있다. 엔비디아는 한술 더 떠 순환 파이낸싱을 한다면서 월가로 부터 거대한 자금을 도입하고 있다.
파이낸싱으로 자금의 숨통을 터주는 것은 인공지능 혁명을 가속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엔비디아로부터 자금을 유입받은 이들 기업이 그 투자금의 대부분을 다시 엔비디아의 최신 GPU(H100, B200 등)를 대량 구매하는 데 집행한다는 점이다.이 고리 속에서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은 천문학적인 GPU 구매 비용을 충당할 수 있게 되고, 엔비디아는 자신이 투입한 자금을 자사의 매출과 현금 유입으로 즉시 환수한다. 표면적으로는 엔비디아의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대되고, 장부상 영업이익률이 경이로운 수준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실적의 상당 부분은 외부에서 유입된 순수한 시장 수요가 아니라, 엔비디아 스스로가 자본을 투입하여 인위적으로 창출해 낸 매출 착시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투자금이 곧바로 매출로 전환되고, 이 매출이 다시 주가 상승을 견인하여 더 많은 현금을 창출해 내는 순환 구조는 과거 닷컴버블 시기 루슨트 테크놀로지가 보여준 벤더 파이낸싱의 위험한 재현에 다름 아니다.
순환 파이낸싱 구조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은 하나다. 엔비디아의 자금을 받아 GPU를 구매한 기업들이 실제 시장에서 자생적인 수익 모델을 확립하고, 지속 가능한 현금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AI 산업 전반이 직면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이 '수익화(Monetization)의 부재'에 있다. 챗GPT를 필두로 한 생성형 AI 기술이 대중에게 안겨준 기술적 충격은 거대했으나, 그 기술을 실제 거대한 수익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극도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과 스타트업들이 AI 데이터센터 구축과 전력 수급, GPU 인프라 유지에 쏟아붓는 천문학적인 자본 지출(CapEx)에 비해, B2B 및 B2C 시장에서 실제 회수되고 있는 유료 구독료나 서비스 매출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AI 수익화의 지연은 순환 파이낸싱 구조에 구조적 파열음을 야기한다.자산 가치의 급격한 하락과 감가상각 부담: GPU는 수명이 매우 짧은 반도체 자산이다. 차세대 아키텍처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 GPU의 가치는 하락한다. 엔비디아의 투자를 받아 GPU를 대량 구매한 스타트업들은 실질적인 수익을 내기도 전에 막대한 자산 감가상각 비용을 감당해야 하며, 이는 재무 구조의 급격한 악화로 직결된다.중고 GPU 물량 폭증에 따른 시장 가격 파괴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수익 창출에 실패한 한계 AI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하거나 사업을 축소할 경우, 이들이 보유하던 대량의 GPU가 중고 시장에 헐값으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는 엔비디아가 신규로 판매해야 할 최신 반도체의 수요를 직접적으로 상쇄하며 가격 결정력을 무너뜨리는 악재로 작용한다.
엔비디아의 높은 영업이익률과 독점적 지위에 부담을 느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은 자체 AI 반도체(ASIC)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위 스타트업이 부실화되는 상황에서 거대 공룡 고객사마저 이탈한다면, 엔비디아의 매출 기반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인터넷 통신 혁명 당시에도 광통신망 자체는 인류의 삶을 바꿀 위대한 기술이었음이 분명했다. 기술의 정당성과 별개로, 그 기술을 담아내는 기업들의 과도한 자본 집행과 순환 파이낸싱을 통한 실적 착시는 결국 거대하게 부푼 거품이 터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기술의 미래 가치가 아무리 눈부시다 할지라도, 금융과 회계의 법칙을 뛰어넘는 자가발전식 성장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엔비디아가 투자한 스타트업들과 생태계 참여자들이 끝내 스스로 돈을 버는 자생적 비즈니스 모델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엔비디아가 누려온 압도적인 프리미엄은 순식간에 거대한 부실의 역풍으로 돌아올 수 있다.역사는 이미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