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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등꽃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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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꽃을 보며 / 백승훈 시인
불암산으로 철쭉꽃 보러 가던 길에 작은 암자 모퉁이에 황홀할 만큼 눈부시게 핀 등꽃을 보았다. 고사목 등걸을 타고 오른 등나무가 사방으로 덩굴을 뻗어 연보라색 꽃송이를 달고 선 모습이 마치 커다란 꽃다발처럼 보였다. 올 초 세상을 떠난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의 부랑아 출신 작가). 지게꾼 시인으로 불린 김신용 시인의 유고 시집의 ‘등꽃 아래’란 시를 떠올린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 등꽃, 환하다.// 제 그늘 너무 짙어 등 하나 켜 놓은 것 같다.// 빈자(貧者)의 일등(一燈)도 저와 같을까// 대낮에도 밝게 켜 놓은// 저 등, 아래 서면// 그래, 누군가 발 헛디딜 이 없겠다." ('등꽃 아래' 전문)
시인의 시가 아니라 해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환한 그늘이 등꽃 그늘이 아닐까 싶다. 갈등(葛藤)이라는 말은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어떤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을 빚을 때 쓰는 말이다. 칡과 등나무를 뜻하는 한자가 만나 이런 뜻을 지니게 된 데에는 두 나무가 지닌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칡과 등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덩굴나무여서 다른 나무들을 감고 올라가며 자라는데 칡은 오른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므로 만약 칡과 등나무가 한 나무에서 만나면 서로 엉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나무가 사는 곳이 달라 실제로 서로 얽혀서 갈등을 빚는 상황을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학창 시절 교정의 벤치 위로 올려진 등나무 그늘이나 소공원의 등나무 벤치에서 보았던 등꽃을 생각하며 의금상경(衣錦尙絅)의 꽃이라 칭했던 적이 있다. 이는 “비단옷 위에 홑옷을 걸쳐 입는다”는 의미로 중국 춘추시대 때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제나라 귀족의 딸 장강이 이웃 위나라 왕에게 시집가면서 비단옷 위에 삼베옷을 입고 나왔다. 장강은 큰 키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빼어난 미녀였지만 자신의 잘난 인물과 왕비가 된다는 신분 상승의 화려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삼베옷을 걸친 것이었다. 등꽃은 여느 꽃 못지않게 예쁘고 향기 또한 그윽함에도 제 그늘에 숨어 피기에 그리 비유를 했던 것인데, 커다란 꽃다발처럼 사월의 햇살 아래 화려하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니 나의 무지함을 탓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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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는 난대성 식물이지만 주로 온대 지역에서 자생하며, 산기슭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잘 자란다. 특히 생명력이 강해서 다양한 환경에서도 잘 적응해 힘차게 줄기를 뻗는다. 등나무는 초록 그늘만으로도 일품이지만 꽃 피는 봄이 되면 그 진가를 드러낸다. 마치 포도송이처럼 달리는 연보라색 꽃송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맑고 그윽한 향기는 절로 눈이 스르르 감기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예로부터 보랏빛 꽃이 피어 자등(紫藤)으로 불렸다는 등나무꽃, 그 꽃그늘에 앉아 있으면 살랑이는 바람결에 묻어나는 꽃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코가 벌름거려진다.

이제 숲에는 진달래 뒤를 이어 피었던 산철쭉도 하나둘 지고 흰 꽃들이 부쩍 늘었다. 말발도리나 팥배나무꽃 등 흰 꽃들이 자주 눈에 띈다. 잎이 나기 전 피어났던 꽃들이 사라지면 숲은 초록으로 짙어져 여름을 향해 간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흰색 꽃이 늘어나는 것은 초록이 대세인 숲에 맞서 색을 고집하는 것이 무모하다는 걸 식물들은 오랜 진화를 통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리에서나 숲에서 연보라색 등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지는 숲 언저리에서 만나는 등꽃은 봄 숲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이제 봄도 깊어 사월도 끝자락이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고 바쁘다 해도 보랏빛 등꽃을 보면 잠시라도 그 꽃그늘에 쉬었다 갈 일이다. 치유란 특별한 게 아니다. 잠시 세상살이의 시름을 잊어버리고 등꽃의 그늘에 앉아 쉬는 것, 바투 잡았던 생의 고삐를 놓고 보랏빛 꽃향기에 취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치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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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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