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프로메테우스의 가면을 벗긴 할리우드
영화 《아이언맨》이 전 세계 극장가를 강타했을 당시, 주인공 토니 스타크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한 인물을 찾아가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바로 일론 머스크였다. 극 중에서 머스크는 짧은 카메오로 출연하여 천재 공학자이자 유쾌한 억만장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당시 할리우드와 대중문화가 바라본 실리콘밸리의 기술 거물들은 인류의 멸망을 막고 화성 개척과 친환경 전환이라는 웅대한 꿈을 실현할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그 자체였다. 기술은 진보의 동의어였으며, 파괴적 혁신을 이끄는 기업가는 구원자로 숭배받았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오늘날, 할리우드가 바라보는 일론 머스크의 초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스크린 속 그는 더 이상 지구를 구하는 아이언맨이 아니다. 막대한 자본과 독점적 기술 인프라를 바탕으로 민주주의 질서를 뒤흔들고, 여론을 입맛대로 조작하며, 사적인 신념에 따라 국제 분쟁마저 쥐락펴락하려는 ‘위험천만한 기술 과두제(Tech Oligarch)의 수장’이자 냉혹한 악역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 바로 최근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거장 앨릭스 깁니 감독의 다큐멘터리 《머스크(Musk)》의 개봉이다. 4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서사를 통해 깁니 감독은 머스크의 성공 신화 뒤편에 도사린 어두운 민낯을 정면으로 겨냥하였다.
작품은 머스크를 가리켜 "매우 어두운 코미디로 출발하여 결국 공포 영화로 귀결되는 인물"이라 평하며, 그가 쥔 무제한적 권력이 전 세계를 향해 던지는 실존적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실리콘밸리의 총아가 어쩌다 이토록 서늘한 경계의 대상이자 스크린의 빌런으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알고리즘의 무기화와 공론장의 사유화
머스크의 영웅 서사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 트위터(현 X)의 인수였다. 그간 테슬라의 전기차와 스페이스X의 로켓 발사는 인류의 기후 위기 극복 및 우주 탐사라는 대의명분 아래 대중적 지지를 얻어 왔다. 그러나 전 세계인의 실시간 광장 역할을 하던 트위터를 손에 쥐면서 머스크의 권력은 산업적 영역을 넘어 직접적인 여론 통제와 정치적 영향력의 영역으로 번져 나갔다.
그는 ‘절대적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 행보는 극단적 진영 논리와 음모론의 확산을 방조하고 알고리즘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편하는 것에 가까웠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검증되지 않은 가짜 뉴스가 공론장을 뒤덮는 동안, 플랫폼의 기본 규칙은 한 개인의 변덕에 따라 수시로 수정되었다. 공적 토론의 마당이어야 할 플랫폼이 일개 억만장자의 사적 확성기로 전락하는 과정을 목격한 대중과 지식인 사회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영화 《머스크》 역시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플랫폼의 알고리즘 조작 의혹과 자의적인 계정 정지, 그리고 이를 통한 대중 선동은 대중문화 창작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고전적 악역의 클리셰를 상기시켰다. 바로 오슨 웰스의 명작 《시민 케인》에 등장하는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의 독선과 광기다. 대중은 마침내 머스크가 기술을 통해 세상을 연결한 것이 아니라, 정보의 병목점을 장악하여 자신의 권력을 투사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지정학적 인프라 독점과 국가 통제를 넘어선 사적 권력
머스크가 할리우드의 악당으로 낙점된 두 번째 이유는 국가와 정부의 통제를 압도하는 ‘물리적 권력의 비대화’에 있다. 스페이스X의 저궤도 위성 통신망인 ‘스타링크’는 단순한 통신 서비스를 넘어 현대전과 국가 안보의 핵심 전략 자산으로 부상하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특정 작전 지역의 스타링크 접속을 일방적으로 차단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전선의 향방에 직접 개입했던 일화는 전 세계 정책 입안자들과 시민사회에 깊은 서늘함을 안겨 주었다.
선출되지 않은 일개 기업인의 손끝 하나에 주권 국가의 군사 작전과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갈릴 수 있다는 현실은 SF 영화에서나 보던 거대 사기업(Megacorporation)의 디스토피아적 면모를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에 재현해 냈다.
《에일리언》 시리즈의 웨이랜드 유타니나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 사처럼, 국가 권력 위에 군림하며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기술 자본가의 음울한 초상이 머스크의 행보에서 뚜렷하게 겹쳐 보인 것이다.여기에 더해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밀착 및 미 행정부 자문기구 참여 등 정치 전면에 직접 뛰어들며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려는 행보는 전통적으로 권력 분립과 민주적 견제를 중시해 온 미국 문화계에 강력한 경종을 울렸다.
대중의 감시를 벗어난 기술 독점이 제도권 정치와 결탁할 때 발생하는 파괴력은 더 이상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닌 목전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시민 케인'과 '프랑켄슈타인'의 결합
영화 전문지 《필름 쿼털리》는 최근 영화계에서 묘사되는 테크 거물들의 형상을 두고, "《시민 케인》의 탐욕스러운 사업가와 《프랑켄슈타인》의 미친 과학자가 결합된 새로운 전형"이라고 통찰하였다. 이 평가는 머스크를 향한 대중의 시선 변화를 가장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과거 영화 《잡스》나 《소셜 네트워크》가 창업자들의 괴팍한 성격과 인간적 결함을 조명하면서도 끝내 그들의 천재성과 창의성에 일말의 경의를 표했다면, 최근 쏟아져 나오는 테크 드라마들은 그 어떤 낭만도 허용하지 않는다.
페이스북의 이윤 추구와 알고리즘 유해성을 고발한 애런 소킨의 《소셜 레코닝(The Social Reckoning)》, 샘 올트먼의 권력욕을 파헤친 루카 구아다니노의 《아티피셜(Artificial)》, 그리고 머스크를 정조준한 앨릭스 깁니의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물음을 던진다.
머스크는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체 AI 기업인 xAI를 설립해 규제 없는 초지능 경쟁을 질주한다. 자신만이 인류를 다행성 종족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면서도, 지상에서는 노동자 권익을 탄압하고 비판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데 주저함이 없다. 대중은 더 이상 그 모순을 '천재의 기벽'으로 너그럽게 보아넘기지 않는다.
자신이 빚어낸 괴물에 압도당하면서도 끝내 신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메리 셸리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처럼, 통제 불능에 빠진 오만의 화신으로 그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과 식어버린 찬가
머스크가 스크린의 악역으로 굳어지는 과정은 영화 외적인 갈등에서도 명징하게 입증되었다. 다큐멘터리 《머스크》가 완성된 이후, 머스크의 법률 대리인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운운하며 제작진을 압박했고, 머스크가 소유한 플랫폼 X는 해당 다큐멘터리의 유료 예고편 광고 집행을 전면 거부하였다.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투사를 자처하던 인물이 자신을 비판하는 문화 예술 콘텐츠를 마주하자 가장 원초적인 자본의 힘으로 입틀어막기를 시도한 셈이다. 결국 일론 머스크가 할리우드의 악역으로 전락한 사연은 한 개인의 평판 하락을 넘어, 지난 반세기 동안 실리콘밸리가 누려왔던 ‘기술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대중사회의 거대한 환멸과 궤를 같이한다.
대중은 이제 깨달았다. 스크린 너머 화려한 로켓 발사와 미래지향적인 사이버트럭의 외피 아래 도사리고 있던 것은 인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의 탐욕과 통제되지 않는 절대권력의 욕망이었음을 말이다. 할리우드는 시대를 반영하는 가장 예민한 거울이다. 영웅을 찬양하던 무대에서 추악한 독재자를 고발하는 단두대로 조명이 바뀌었을 때, 그 스포트라이트의 한가운데에 선 일론 머스크의 모습은 서글프게도 그 자신이 자초한 결과였다. 대중의 열렬했던 환호가 싸늘한 경계로 식어버린 지금, 할리우드가 써 내려가는 머스크의 서사는 더 이상 희망찬 SF 신화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묵시록적 정치 스릴러로 굳어지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