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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 대신 순찰함… 일본, 아세안 ‘해상 공급망 질서’ 바꾼다

‘회색지대 충돌’ 파고든 일본 민간 모델… 필리핀·베트남서 신뢰도 1위 확보
자원 동맹 ‘POWERR Asia’ 가동… 반도체·에너지 해상 물류 리스크 점검해야
일본이 군사적 억지력 대신 민간 역량 강화와 정보 공유를 앞세워 동남아시아 해양 안보 지형을 급격히 재편하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일본이 군사적 억지력 대신 민간 역량 강화와 정보 공유를 앞세워 동남아시아 해양 안보 지형을 급격히 재편하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

호주 국립대 부설 싱크탱크 이스트아시아포럼(EAF)은 지난 18(현지시각) 분석을 통해 일본이 군사적 억지력 대신 민간 역량 강화와 정보 공유를 앞세워 동남아시아 해양 안보 지형을 급격히 재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남중국해 갈등이 군사 충돌에서 해경 중심의 '회색지대 충돌'로 이동하면서 일본의 비군사 모델이 실효성을 확보하고 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지정학적 전선이 해상 물류망으로 전이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도 아세안 해상 공급망 리스크를 산업별로 다각도로 점검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법집행·규범·공급망' 연계한 3단 구조화 전략


일본 전략의 핵심은 '법집행–규범–공급망'으로 이어지는 3단 구조다. 일본은 말라카 해협을 비롯한 주요 해상 항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군대가 아닌 일본 해상경비대(JCG)를 전면에 배치했다. 아세안 국가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군사화나 동맹 구축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안보 질서에 스며드는 전략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개발 원조(ODA)로 제공하는 순찰함은 무장 없이 인도하며, 합동 훈련도 해군 작전이 아닌 해안경비대의 범죄 대응 역량 향상에 집중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중국의 강압적인 해양 진출 압박을 직접 받는 국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싱가포르 동남아시아학연구소(ISEAS-Yusof Ishak Institute)20264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세안 전체 응답자의 65.6%가 일본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가로 꼽았다. 이는 유럽연합(EU)이나 미국, 중국을 앞서는 수치다. 특히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당사국인 필리핀과 베트남의 일본 신뢰도는 각각 77.3%67.9%로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필리핀은 일본국제협력기구(JICA) 지원을 통해 해안경비대의 선박 운영 기준과 증거 처리 절차를 국제표준에 맞추며 법적 협력을 강화했다.

100억 달러 'POWERR Asia'… 인프라 넘어 공급망 패키지로 차별화


일본의 안보 영향력은 이제 단순한 해적 퇴치를 넘어 국가 경제의 생명선인 공급망 전반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지난 20265월 베트남을 방문해 경제 안보와 해상법 집행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 산업 협력과 함께 지난 4월 출범한 100억 달러(153300억 원) 규모의 광범위 에너지 및 자원 의존 파트너십(POWERR Asia)을 통해 베트남 응이손 정유소의 원유 조달을 지원한다.

중국의 일대일로(BRI)가 대규모 항만·도로 등 물리적 인프라 건설에 치중했다면, 일본의 파워 아시아(POWERR Asia)는 정유, 액화천연가스(LNG), 핵심 광물 등 상류 부문(Upstream) 자원 확보와 에너지 공급망 안정화를 동시에 패키지로 묶어 아세안 국가들을 끌어들이는 대안적 성격을 띤다. 이 구조는 일본 종합상사와 에너지 기업의 상류 부문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아세안 국가에는 중국 의존에서 탈피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한다.

하지만 일본식 모델의 지속 가능성에 균열 조짐도 보인다. 일본이 미국과의 군사적 밀착을 가속화하자 비동맹 노선을 중시하는 국가의 반발이 시작됐다.

인도네시아의 일본 신뢰도는 지난해 61.5%에서 올해 47.9%13.6%포인트 급락했다. 비동맹 외교 전통과 자원 수출국 지위를 동시에 가진 인도네시아의 변화는 아세안 내 균열의 바로미터로 해석된다. 아세안 내부의 지정학적 노선 분열은 장기적으로 비동맹 국가들이 항로 통과 규제나 항만 우선권 제한 형태로 대응할 리스크를 파생시키며, 해상 물류의 실질적 통행 제한 조치로 전이될 우려가 크다.

외교가에서는 일본의 군사적 위상이 높아질수록 민간 기관을 앞세운 조용한 안보 전략이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아세안 진출 기업 및 투자자 체크포인트

첫째, 싱가포르 해협 무장 강도 발생률 추이 점검이다. 치안 불안은 해상 보험료 인상과 물류 지연으로 직결된다.

둘째, 아세안 주요국의 일본 해상경비대 합동 훈련 빈도 추적이다. 훈련 참여율은 역내 친미·친일 안보 블록의 결속력을 가늠하는 척도다.

셋째, 인도네시아 등 비동맹 거점국의 해상 통행 규제 가능성 평가다. ·일 밀착에 반발한 규제가 가시화될 경우 대체 해상 경로를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반도체는 시간’, 에너지는 조달’, 해운은 보험리스크 대응해야


국내 전문가들은 일본의 해양 안보 영향력 외연 확장으로 인한 역내 지정학적 변화를 산업별 특성에 맞춰 세분화해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첫째, 반도체 산업은 싱가포르 물류 허브와 말라카 해협 의존도가 절대적인 만큼 해로 분쟁 시 적기 공급(Just-In-Time) 체계가 깨지는 '시간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어 항공 물류 다변화가 요구된다.

둘째, 에너지·정유 산업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주요 자원 거점국의 네트워크 재편에 따른 '조달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상류 부문 지분 다변화가 긴요하다.

셋째, 해운·물류 산업은 분쟁 수위 고조에 따른 해상 보험료 인상과 우회 항로 설정에 따른 '비용 리스크'를 통제해야 한다.

군함이 아닌 순찰함으로 시작된 일본의 조용한 해양 전략은 결국 아세안의 공급망 질서 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상 안보 질서는 더 이상 군사력이 아니라 누가 항로를 관리하느냐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안보 환경의 격변기 속에서 특정 해상 경로의 독점에 따른 물류 마비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한국 기업들의 다각적인 시나리오별 대안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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