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서 푸틴 만난 마르코스 "7600개 섬 지역엔 상업 운전 앞선 러시아형이 최적"
미국 제재·금융 리스크보다 당장 급한 'AI 전력난'… 지정학 뛰어넘은 실리 선택
미국 제재·금융 리스크보다 당장 급한 'AI 전력난'… 지정학 뛰어넘은 실리 선택
이미지 확대보기필리핀이 폭발하는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러시아와 소형모듈원자로(SMR) 도입을 추진한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19일(현지시각) 러시아 브릭스(BRICS) 정상회의가 열린 카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양자 회담을 하고 원전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국영 필리핀뉴스에이전시(PNA)는 20일(현지시각) 이같이 보도했다.
이번 행보는 동남아시아 에너지 시장을 두고 한국, 미국과 경쟁하던 러시아가 SMR 선점 공세를 본격화했다는 의미가 있다. AI 시대의 전력난이 지정학적 역학 관계보다 더 빠르게 각국 정부의 의사결정을 바꾸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전력망 확충 한계 부딪힌 섬으로 구성된 지형… 러시아 상용 SMR이 대안으로 부상
마르코스 대통령은 러시아 국영방송(RT)과의 인터뷰에서 필리핀의 독특한 지리적 특성이 러시아산 SMR을 검토하게 된 배경이라고 밝혔다. 필리핀은 76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다. 모든 지역을 해저 전력 케이블로 연결하는 방식은 천문학적인 비용 탓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 속도가 기존 전력망 확충 속도를 앞지르면서, 중앙집중형 발전 대신 분산형 전원인 SMR이 현실적 대안으로 부상했다. 도입을 검토 중인 발전 용량은 70메가와트(MW)에서 300MW급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러시아가 전 세계에서 상업용 SMR 운영 경험이 가장 앞선 국가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현재 중국도 고온가스로 SMR(HTR-PM) 실증 후 상업 운전에 진입했으나, 러시아는 부유식 SMR을 실제 가동하며 독보적인 상용화 트랙 레코드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결정은 높은 균등화발전비용(LCOE)이라는 경제성 논란보다 당장 급한 '정전 리스크 회피'와 전력 안정성 확보가 정책 우선순위로 올라왔음을 보여준다.
친미 국가의 에너지 실리 선택… 석탄 의존 탈피와 금융·지정학 리스크
필리핀은 1980년대 바탄 원전을 건설하고도 가동하지 못했으나, 최근 수년간 이를 재가동하거나 SMR로 선회하는 원전 정책 고도화를 추진해 왔다. 남중국해 문제로 미국과 안보 협력을 강화해 온 전통적 친미 노선의 필리핀이 에너지 분야에서 러시아와 손을 잡은 것은, 안보와 에너지를 분리하는 일종의 '이중 전략'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대러시아 금융 제재 리스크를 지적한다. 필리핀이 러시아 기술을 도입할 경우, 달러화 결제 제한은 물론 국제 보험·재보험 계약 시스템에서 배제될 위험이 크다. 우라늄 농축 연료 공급망이 러시아에 종속될 수 있다는 점도 핵심 불안 요인이다.
원전 산업은 한 번 도입하면 연료 공급과 유지보수, 규제 프레임까지 묶이는 '60년 락인(Lock-in)' 특성을 지닌다. 러시아가 시장을 선점하면 향후 동남아 전체 원전 수주 시장에서 한국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단기적으론 타당성 검토 가속… 중장기적으론 미·러 기술 패권 경쟁 격화
단기적으로 필리핀과 러시아는 SMR 도입을 위한 세부 기술 검토와 서방 제재를 우회할 재원 조달 방안을 구체화할 전망이다. 필리핀 정부는 전력난 해소가 시급한 만큼 타당성 조사 기간을 최대한 단축한다는 방침이다. 러시아 국영 원전 기업 로사톰의 주도로 우회 금융 조달망이 가동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동남아 지역을 둘러싼 미·러 간의 에너지 안보 패권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우방국을 중심으로 러시아산 원전 연료 차단 압박을 강화할 전망이다. 한국 역시 체코 원전 수주 이후 차세대 수출 동력으로 SMR을 육성하는 상황에서 기술 국산화와 가격 경쟁력 확보라는 과제를 안게 됐다. 동남아 시장을 지키기 위한 정부 차원의 전략적 수주 외교 체계 재정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투자자 체크포인트
첫째, 금융조달 구조의 서방 vs 러시아 정렬 및 본계약 전환 여부를 지켜봐야 한다. 러시아 측 금융 구조가 구체적으로 공개되는 시점과 양국 간 의향서(LOI)가 실제 본계약으로 전환되는지가 향후 가장 강력한 주가 트리거 변수다.
둘째, 국내 원전 기업(두산에너빌리티·현대건설·한전기술)의 수주 차질 우려에 따른 주가 흐름도 주요 변수다. SMR 핵심 장비를 공급하는 두산에너빌리티, 시공을 담당하는 현대건설, 설계를 맡는 한전기술의 수주 기대감이 꺾이면서 단기적으로 주가가 흔들릴 수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셋째, 한·미 SMR 동맹 강화에 따른 '러시아 배제 프리미엄' 반사 수혜 시나리오도 살펴야 한다. 제재 리스크로 인해 필리핀이 서방 공급망으로 회항할 경우, 미국 뉴스케일파워 등과 동맹을 맺은 한국 원전 기업들이 누릴 중장기적 업사이드(Upside) 기회도 상존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