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글로벌이코노믹 로고 검색
검색버튼

[김대호 진단] "초격차의 승부사들" 반도체 기업 열전 ① 기획시리즈를 시작하며

잃어버린 말의 편자를 찾아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 전 고려대 교수  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 전 고려대 교수
[김대호 진단] 초격차의 승부사들 : 반도체 기업 열전 ① 시작하며
- 인공지능 시대의 말의 편자, 반도체 기업의 초격차에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 그 막강했던 힘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적의 로마 군단이나 탁월한 로마법, 혹은 황제의 강력한 리더십을 떠올린다. 그러나 문명의 이면에 숨겨진 기술사와 경제학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한 역사학자들은 전혀 다른 지점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미국의 저명한 기술사학자 린 화이트 주니어(Lynn White Jr.)를 비롯한 오늘날 많은 석학들은 거대한 로마 제국을 지탱하고 대륙을 하나로 묶어낸 실질적인 경쟁력을 다름 아닌 '말 발굽 편자(철제 말 신발)'라는 핵심 부품 기술에서 찾는다.

로마가 지중해를 패권을 장악하며 전 국토를 바둑판처럼 촘촘한 돌길, 즉 '로마 가도(Via)'로 연결했을 때 제국은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난제에 봉착했다. 지중해 전역의 정보와 물자를 신속하게 나르기 위해 단단한 돌로 도로를 포장하자, 그 위를 달리는 군마와 운송마들의 발굽이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흙길과 달리 거친 돌바닥은 말의 발굽을 순식간에 갈아버렸고, 발에 염증이 생긴 말들은 절름발이가 되어 쓰러지기 일쑤였다. 말이 쓰러진다는 것은 공공 우편 마차 시스템인 '쿠르수스 푸블리쿠스(Cursus publicus)'가 멈춘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제국의 대동맥인 물류망과 행정망이 마비됨을 의미했다.
이때 로마의 엔지니어들이 대장간에서 벼려낸 혁신적인 기술적 돌파구가 바로 가죽과 철판을 결합해 말의 발을 감싸는 특수한 금속제 신발, 이른바 '히포샌들(Hipposandal)'이었다. 말의 발굽에 직접 못을 박는 현대적 의미의 편자로 진화하기 전 단계였던 이 철제 신발은 로마 제국의 물류 효율성을 극적으로 끌어올렸다.철제 신발을 착용한 로마의 마필들은 거친 돌길 위에서도 발굽이 깨지지 않은 채 기존보다 두 배 이상 먼 거리를,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지치지 않고 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제국 전역의 곡물, 직물, 광물이 정체 없이 최단 시간 내에 유통되었고, 전선의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는 기병대의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판세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아닌, 당대 최고 수준의 철기 공학이 집약된 작은 '말 신발 부품' 하나가 로마 제국의 패권과 거시 경제를 지속시킨 실질적인 초격차 동력이었던 셈이다.

2021년 백악관 반도체 대책 회의에 참석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손에 300mm 반도체 웨이퍼를 높이 치켜들고 "반도체는 현대의 말 편자(Horseshoe)다"라고 일갈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린 화이트 주니어가 고증한 히포샌들이라는 기술이 로마의 물류와 경제 안보를 가르는 핵심 요소였던 것처럼, 인공지능(AI) 혁명이 몰아치는 대전환기 속에서 반도체는 전 세계 산업과 국가 안보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현대판 말 편자'다.

스마트폰, 자동차, 첨단 군사 무기, 그리고 인류의 뇌를 대체하겠다는 초거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이르기까지 이 반도체가 제때 공급되지 않거나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는 순간, 현대의 제국들은 순식간에 성장을 멈추고 도태된다. 이제 세계 경제의 운명은 이 현대판 말 편자를 가장 정밀하게 설계하고 가장 미세하게 찍어내는 '반도체 기업들'의 손에 완전히 달려 있다. 반도체가 인류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명제는 추상적인 수사나 현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는 매 분기 발표되는 냉정한 기업 실적과 거시 경제 지표가 온전히 증명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세계 최고 성능의 AI 가속기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엔비디아(NVIDIA)의 실적 추이는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지표다. 인공지능 인프라 구축 붐이 본격화된 이후 엔비디아가 거둔 분기별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수백 퍼센트씩 폭증하는 기염을 토했다. 매출 총이익률(Gross Margin)이 70%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수익성을 바탕으로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수조 달러를 넘나들며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제치고 글로벌 시가총액 1위 자리를 공고히 다졌다. 이제 엔비디아의 주가 변동과 실적 가이드라인에 뉴욕 증시의 S&P 500 지수와 나스닥이 통째로 흔들리는 현상은 글로벌 금융 시장의 일상이 되었다. 개별 반도체 기업 하나가 전 세계 자본 시장의 유동성과 투자 심리를 좌우하는 거대한 핵으로 부상한 것이다.
우리 경제 구조 역시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한국의 총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통상 20% 안팎을 넘나들며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반도체 시황의 호불황 주기에 따라 대한민국의 경상수지 흑자 폭이 결정되고, 원·달러 환율이 요동치며, 국가 잠재성장률의 곡선 자체가 바뀐다. 최근 SK하이닉스가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며 거둔 단일 분기 수조 원대 규모의 역대급 영업이익 실적은 한 기업의 성과를 넘어, 고물가·고금리로 침체된 대한민국 경제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방파제 역할을 해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부문에서 수율과 공정 전환의 난제를 해결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국가 세수와 내성 경제의 기초체력이 좌우되는 것이 우리가 발을 붙이고 있는 현실이다.

과거 산업혁명기에는 석유를 확보한 정유회사나 철강을 대량 생산하는 기업들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쥐었다. 석유 매장량이 곧 국가의 권력이던 시대였다. 현대 경제의 부가가치는 석유가 아닌 '모래(규소)를 가공해 지능을 부여하는' 반도체 기업들의 손끝에서 창출된다. 반도체 기업의 성공과 실패는 해당 국가의 재정 건전성 및 고용 시장과 직결되며, 궁극적으로 글로벌 부의 지도를 재편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다. 반도체 산업이 자동차나 조선 등 여타 전통 제조업과 극단적으로 차별화되는 지점은 '초격차 기술'의 존재 여부다. 다른 산업군에서는 2위, 3위 기업도 원가 절감이나 특화된 틈새시장 공략을 통해 일정 수준의 생존과 이익 창출이 가능하다. 그러나 반도체 시장은 철저하게 '승자독식(Winner-Take-All)'의 논리가 지배한다. 단 수개월의 기술 격차가 시장의 전체 이익을 독점하느냐, 혹은 천문학적인 적자의 늪에 빠져 파산하느냐를 가른다.

그 중심에는 '미세 공정 전환'과 '수율(Yield)'의 처절한 싸움이 있다. 현재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의 절대 강자인 TSMC와 이를 추격하는 삼성전자는 3나노미터(nm)를 넘어 2나노, 나아가 1.4나노 공정 도입을 두고 사투를 벌이고 있다. 나노미터는 10억 분의 1미터로,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일에 불과한 미세한 회로를 그리기 위해 대당 3,000억 원에서 5,000억 원에 달하는 네덜란드 ASML의 EUV(극자외선) 및 차세대 High-NA EUV 노광 장비를 경쟁적으로 확보해야만 한다.

이 미세화 공정에서 단 10%의 수율 우위를 먼저 확보하는 기업이 애플, 구글, 메타 등 전 세계 대형 빅테크 기업들의 첨단 칩 물량을 독점 수주하게 된다. 반도체 공장은 한 번 지을 때 수십 조 원의 설비 투자비(CapEx)가 고정비로 묶이기 때문에, 수율 안정화에 실패해 양산 일정이 뒤처진 기업은 그 막대한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경영 위기에 직면한다. 과거 대만의 무수한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구조조정 속에서 도태되고 TSMC가 독점적 거인으로 성장한 과정이나, 일본의 엘피다(Elpida)가 D램 치킨게임에서 버티지 못하고 파산했던 역사는 미세 공정 경쟁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생생한 교훈이다.
요즈음 AI 반도체 전선에서는 메모리 성능의 물리적 한계를 뚫어내는 아키텍처(구조) 싸움으로 전장이 확장되고 있다. 연산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라지는데 메모리가 데이터를 보내주는 속도가 받쳐주지 못하는 '메모리 벽(Memory Wall)'을 해결하기 위해,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 전송 대역폭을 극대화한 HBM 기술이 등장했다. 이 HBM은 단순히 메모리를 잘 만드는 것을 넘어, TSMC의 첨단 패키징 공정(CoWoS)과 결합해야만 최종적인 AI 가속기로 완성된다. 결국 인류가 더 똑똑한 인공지능을 만나고 인프라를 확장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이 미세한 공정 한계를 깨부수는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집념과 기업 경영진의 과감한 투자 결단에 달려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고도화 속도는 전적으로 반도체 기업들이 공급하는 '칩의 계산 능력'에 비례한다. 거대언어모델(LLM)을 훈련하고 추론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의 핵심은 인공지능 가속기다. 엔비디아의 '블랙웰(Blackwell)' 시리즈나 그다음 세대의 첨단 차세대 칩들이 제때, 충분한 수량으로 전 세계 데이터센터에 공급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AI 진화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게 된다. 인류의 집단 지능 확장의 상한선을 반도체 제조 기업들이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반도체 기업들의 성공에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단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실존적 과제를 반도체 기술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전력 소비와 에너지 위기의 돌파다. 현재 전 세계 AI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전력량은 웬만한 중소 국가 전체의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수준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인공지능 구동을 위한 전력 고갈로 전 지구적 에너지 마비가 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동일한 전력으로 수십 배, 수백 배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저전력·고효율 반도체' 및 '뉴로모픽(인간 brain 모방) 칩' 개발이 필수적이다. 반도체 기업들이 이 전력 효율 초격차를 달성하지 못하면 인류는 AI 발전의 대가로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맞이해야 한다.

둘째, 자율주행 및 실시간 제어의 안전성 확보 지점이다.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완전 자율주행차나 스마트 로보틱스 분야에서는 데이터 처리의 지연 시간(Latency)을 극단적으로 줄여야 한다. 중앙 서버를 거치지 않고 차량이나 로봇 내부에서 실시간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판단을 내리는 '온디바이스(On-Device) AI' 반도체의 성능이 고도화되어야만 완벽한 자율주행이 비로소 안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 반도체 칩의 신뢰성이 곧 인류의 생명선과 직결되는 이유다.

셋째, 과학적 인류 난제 해결의 가속화다. 신약 개발, 기후 변화 예측, 신소재 합성 등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생존 과제들은 무수한 분자 구조 분석과 우주적 규모의 시뮬레이션을 필요로 한다. 이를 고속으로 수행하는 슈퍼컴퓨터의 심장 역시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와 초고속 메모리의 초긴밀 연합체다. 반도체 기업들이 연산 장벽을 깨부술 때마다 인류의 질병 정복과 기후 위기 대응 시계는 한층 빨라진다.

유럽의 오랜 구전 민요 중에는 전쟁의 승패와 공급망의 본질을 꿰뚫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못이 없어서 말 편자를 잃었고, 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말을 잃어서 장수를 잃었고, 장수를 잃어서 전투에서 졌으며, 전투에서 져서 나라를 잃었다."조 바이든 대통령이 경고한 말 편자의 교훈은 현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과 기술 생태계에 소름 끼치도록 그대로 대입된다. 설계 자산(IP) 하나, 네덜란드 노광 장비 한 대, 특수 가스나 소재 하나, 그리고 수율을 결정짓는 미세 공정 노하우 하나라는 '못과 편자'를 경쟁사에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순간, 해당 반도체 기업은 물론 그 기업을 보유한 국가 전체의 산업 패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린다. 반도체 공정이 고도화될수록 미세한 부품과 소재의 종속성은 더욱 심화되며, 이는 국가 간의 거대한 외교적·군사적 압박 카드로 활용된다.

이 시리즈에서 앞으로 다룰 반도체 기업들의 역사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번 기업들의 화려한 성공 신화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자본과 인재를 투입해 물리적 한계와 자연의 법칙에 도전했던 무수한 천재 엔지니어들과 경영자들의 혈투 기록이며, 한순간의 기술적 오판이나 공정 전환 지연으로 제국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했던 냉혹한 생존 게임의 보고서다. 원천 특허와 컨트롤러 기술로 플래시 메모리 대중화를 이끌며 전 세계 반도체 거인들에게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징수했던 샌디스크,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철학 아래 파운드리라는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하여 전 세계 칩 공급망을 장악한 TSMC, 무수한 치킨게임과 외환위기 속에서도 기술 집념 하나로 ‘메모리 코리아’의 신화를 일궈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CPU 시대를 지배했으나 모바일과 파운드리 전환기에서 뼈아픈 실책을 겪고 다시금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는 인텔에 이르기까지.잃어버린 말 발굽의 새 편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 현장을 찾아간다.

반도체 거인들의 발자취와 실적, 그리고 기술적 돌파구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것은 인류의 디지털 미래와 글로벌 거시 경제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를 예측하는 가장 정확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 인류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초격차의 승부사들. 그 위대한 반도체 기업들의 본격적인 열전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맨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