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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우’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성취가 아니라 ‘인품’

[힐링마음산책(322)] 국민배우 안성기 님을 추모하며
지난 5일 별세한 배우 안성기의 서울성모병원 빈소에 훈장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5일 별세한 배우 안성기의 서울성모병원 빈소에 훈장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2026년 1월 5일,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자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었던 배우 안성기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새해 벽두에 알려진 그의 별세 소식에 전 국민적인 애도의 물결이 일렁인 것은 단순히 그가 뛰어난 연기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중은 그를 "국민배우"라는 더없이 친근하고도 고결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한 개인이 일했던 직군 앞에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허락되기 위해서 압도적인 재능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는 단지 ‘필요조건’이다.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결점이 없는 인격적 서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인품’이라는 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리 속담에도 “인품이 좋으면 한 마당귀에 시아비가 아홉”이라고 했다. 이 속담은 여자가 품성이 좋으면 욕심내는 사람이 많아서 시아비 될 사람이 마당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사람이 잘나서 따르는 사람이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69년의 여정, 기록보다 중요한 것


1957년 다섯 살의 나이에 <황금열차>로 데뷔해 69년간 약 170편의 작품을 남긴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1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실미도>를 일궈냈고, 2013년 '은관문화훈장'에 이어 서거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기록보다 우리를 더 숙연하게 하는 것은 거장 임권택 감독의 "그렇게 살아내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회고처럼 그의 인격적 자취다. 그가 국민배우로 추앙받은 비결은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지극한 배려와 공감 능력에 있다.

아내를 위한 원칙


안성기 배우가 사적인 삶과 공적인 활동 사이에서 보여준 일관된 윤리 의식은 특별했다. 그는 평생 아내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베드신 촬영을 기피해 왔다.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원칙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배우로서 극의 흐름상 필요하다면 연기해야겠지만, 그것이 평생을 함께하는 아내에게 심리적 고통을 준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불편해할 일을 굳이 직업이라는 핑계로 강요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그는 불가피한 장면에서 대역을 사용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약속을 지켰다. 자신의 사회적 성취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정서적 안정을 우선순위에 두는 그의 태도는, 현대인의 관계 맺기에서 가장 결핍된 존중과 배려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결식장의 영정 사진은 1987년 <기쁜 우리 젊은 날> 촬영 당시의 풋풋한 모습이다. 이는 고인의 부인이 직접 고른 것으로, "나에게 안성기는 바로 그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라는 애틋한 사랑의 고백으로 남편의 사랑과 존중에 보답했다. 물론 이 글은 출연하는 작품의 예술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격렬한 베드신 연기를 마다하지 않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혼(演技魂)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안성기 배우의 부인에 대한 배려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랜저를 사도 괜찮을까요


그의 공감 능력은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향해 있었다. 김성수 감독의 "완전한 배우 이전 완전한 인격체"라는 극찬을 들어도 부족하지 않을 인성의 소유자였던 그가 한때 국산 고급 세단의 대명사였던 그랜저 승용차 구입을 오랫동안 망설였던 일화는 그 정점을 보여준다.

고급 외제 차를 타는 영화배우들이 흔했던 시절, 국산 차를 타던 그가 차를 바꾸기 위해 함께 영화를 찍었던 감독에게 당시 고급 국산 차인 그랜저를 사도 괜찮냐며 조언을 청했다. 영화 현장에서 제작사가 점심도 주지 못해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던 스태프가 태반이었던 시절, 자신이 스타라고 국산 고급 승용차를 타면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위화감을 줄까 봐 나온 고민이었다. 자신의 소비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끼칠지 고민하는 이 사려 깊은 태도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타인에 대한 공감의 표본이다.

관리사무소 직원들과의 저녁

안성기 배우의 타인에 대한 배려는 비단 가족이나 동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년에 한 번씩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관리사무소 직원 전원을 힐튼호텔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동석했던 직원이 올린 글에는 "안성기 배우는 정장을, 배우자분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직원 한 명 한 명과 사진 촬영까지 해줬다"고 전했다. 이어 "유명 인사가 팁을 주거나 선물 세트를 건넸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이렇게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 마음을 전한 경우는 처음"이라며 "고 안성기 배우님, 좋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으시길 바란다"고 적었다.

후배들이 기억하는 북극성


고인의 인품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후배 배우들의 증언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발인식에서 영정을 들고 앞장섰던 배우 이정재는 고인을 향해 "안성기 선배님은 한국 영화 그 자체였다. 현장에서 선배님이 보여주신 평온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저희 후배들에게는 늘 닮고 싶은 북극성 같았다"라며 깊은 경의를 표했다.

고인이 수여받은 금관문화훈장을 들고 앞장섰던 배우 정우성 역시 "선배님은 늘 말씀보다 행동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쳐 주셨다. 촬영장에서 막내 스태프의 안부를 묻던 선배님의 따뜻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저희에게 남겨주신 인간다움의 가치와 영화를 향한 그 순수한 열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그를 영화적 스승으로 기렸다.

오랜 세월 고인과 가까운 곳에서 우정을 나눴던 배우 박중훈의 추모담은 안성기라는 인물의 깊이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안성기 선배님은 단 한 번도 남의 단점을 말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하는 법이 없었다. 현장에서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화를 내기보다 '허허' 웃으며 막내 스태프의 손을 먼저 잡아주시는 분이었다. 선배님은 저에게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보다 삶으로 가르쳐 주셨다.”

이들의 회고는 안성기 배우가 가졌던 권위주의 없는 리더십과 수평적 공감이 동료들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안전 기지를 제공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실력으로 정점에 서면서도 태도로는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어른의 표본이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명동성당 영결식에서 장남 안다빈 작가가 낭독한 30여 년 전의 편지는 고인이 다음 세대에 남기고 싶었던 가치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1993년, 갓 태어난 아들에게 보낸 빛바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항상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실패나 슬픔을 마음의 평화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거라.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이란 바로 착한 사람이란 것을 잊지 말아라.”

이 문장들은 평생 그가 살아낸 삶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자신의 그랜저 승용차가 밤샘 고생을 하는 스태프들에게 박탈감을 줄까 봐 구입을 망설였던 그 마음이 바로 아들에게 당부한 '착한 사람'의 실체였다.

성취가 아니라 인품


안성기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성취가 아니라 ‘인품’, 즉 한 인간의 품격이다. 그의 이름 앞에 "국민배우"라는 존경의 명칭이 붙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오래 배우 생활을 해서도 아니고, 그가 많은 영화에 출연해서도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보다 더 오래 배우 생활을 한 스타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국민배우"라고 부르며 존경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국민배우"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것은 그가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삶을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 밖에서도 한 인간이 얼마나 품위 있게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했기 때문이다. 국민은 그를 보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그를 보며 우리 사회가 아직은 따뜻한 곳이라는 심리적 위안을 얻었다. 비록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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