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마음산책(319)] 맞물리는 유아기와 노년기
이미지 확대보기우리는 삶이 성장과 쇠퇴, 성취와 실패, 상승과 하강의 연속이라는 통념에 익숙하다. 그러나 생애의 양 끝에서 인간이 맞이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고 근본적이다. 전생애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 Erikson)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본적 신뢰(basic trust)'와 '자아통합(ego integrity)' 그리고 '궁극적 타자(Ultimate Other)'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유아기와 기본적 신뢰
갓 태어난 아기는 단 한 사람을 인지(認知)한다. 그리고 그 인지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 사람은 대개 어머니이거나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는 ‘어머니 대리자’이다. 아기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직 실제 세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에게 세계는 거대한 침묵이며, 자신은 그 속에서 원초적 욕망에 따라 울고 몸짓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 울음에 응답하는 존재가 있다. 이 작은 몸짓에 의미를 부여하는 누군가가 있다. 아기의 세계는 곧 '돌봐주는 타자' 한 사람으로 구체화된다. 그때 아기의 세계는 조금씩 윤곽을 갖춘다. 우리는 흔히 "아기가 어머니에게 의존한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기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세계와 첫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를 통해 아기는 감각과 정서로 신호를 받아들인다. "울면 누군가 온다." "배고프면 먹을 것이 주어진다." "세상은 나를 적대하지 않는다." "나는 버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 감각은 평생 지속되는 가장 기초적 정서, 즉 에릭슨이 말한 '기본적 신뢰'의 기원이 된다.
이 신뢰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뜻만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힘들어도 나는 감당할 수 있다" 또는 "위협이 있어도 나는 버려지지 않는다"라는 자신과 삶에 대한 근본적 확신이다. 삶의 불안정성을 견딜 수 있는 자아의 힘을 기르는 내면의 첫 발판을 의미한다.
이때 경험되는 타자는 아기에게 압도적 존재, 즉 ‘궁극적 타자’로 경험된다. 궁극적 타자는 '내가 미처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대신 감당해주는 큰 존재'를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기가 신뢰하는 대상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아직 '개인(person)'이라는 개념을 모른다. 아기가 경험하는 어머니는 거대한 세계 자체이며, 자신의 생존을 책임지는 절대적 타자다. 따라서 유아기의 신뢰는 어머니 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나의 필요와 존재에 전 세계가 응답한다'는 초월적 감각의 초석이 된다.
노년기와 자아통합
노년기에 인간은 다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내가 살아온 이 삶은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온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면 무엇에 의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성공했는가 혹은 실패했는가?"라는 이분법적 평가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평가다. 에릭슨은 노년기의 성숙을 '자아통합'이라고 불렀다. 자아통합은 한마디로 "비록 흠이 있고 모순과 실패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수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후회, 죄책감, 미완성의 아쉬움, 말하지 못한 상처와 남겨진 과업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처럼 자신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삶의 부분 수용(受容)을 오직 자기 내부의 힘으로만 이루지 못한다. 노년기에는 유아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지각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몸은 약해지고, 사회적 역할은 사라지고, 의지와 계획이 더 이상 예전처럼 세계를 움직이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자기를 넘어선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어린 시절의 환상처럼 모든 계획한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전능(全能)한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 영생(永生)의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점점 더 현실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런 ‘미완성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영생불멸의 전지전능한 대상이 필요하다.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의 질서'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우주적 질서'이기도 하며, 또 '삶을 관통하는 윤리적 원리'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철학적 세계관'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적 절대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무엇이든 노년기에 지나온 삶을 통합하고 평온을 얻기 위해서는 '삶 전체를 맡길 수 있는 더 큰 무엇'을 발견하고 의지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마지막에 도달해 마주하는 이 질문, "무엇에 기대어 내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노년기를 유아기의 정서와 가장 깊은 방식으로 다시 연결한다는 점이다.
생의 처음과 끝: 닮은 두 지점
유아기와 노년기는 서로 전혀 다른 시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구조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첫째, 두 시기 모두 '타자에 대한 신뢰' 위에 서 있다. 유아기에는 생존을 위해 타자를 신뢰해야 한다. 노년기에는 생의 전체를 정리하고 이해하기 위해 타자 혹은 더 큰 질서에 의지해야 한다.
둘째, 두 시기 모두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 아기는 처음부터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노인은 점점 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두 시기 모두 '삶의 근본 질문'과 마주한다. 유아기에는 "이 세계는 신뢰할 수 있는가?"에 답해야 한다. 노년기에는 "내가 살아온 삶은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넷째, 두 시기 모두 '타자에 대한 감각'으로 삶을 유지한다. 아기는 어머니가 따뜻하게 돌봐주는 경험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노인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더 큰 흐름과 의미를 느낄 때, 그 덕분에 남은 삶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다.
생의 가장 처음에 마주친 이 질문은 생의 마지막에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비로소 통합과 평온이 싹트기 시작한다. 인간은 이처럼 삶의 양 끝에서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동일한 감정과 마주한다. 불안, 기대, 두려움, 경외, 의존, 신뢰. 이 감정들은 모두 '타자'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배열된다.
이 구조는 특정 신념이나 종교적 교리에 기반한 해석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보편적 진실을 드러낸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를 세울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삶의 처음과 끝에서는 언제나 같은 대답으로 돌아온다. "나는 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자각은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의 시작이다. 타자를 신뢰할 수 있는 능력, 즉 필요할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는 '자기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의 핵심이다. 바로 이 지혜가 개인의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존재
유아기의 신뢰와 노년기의 평온은 단순한 발달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바깥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는 오래된 진실을 말하고 있다. 태어날 때 우리는 한 타자의 손길에서 시작했고, 떠나기 전 우리는 다시 자기보다 큰 어떤 질서의 품을 찾는다. 삶이란 결국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인간의 구조가 처음과 끝에서 서로를 만나며 펼치는 한 편의 긴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 12월의 거리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한 해의 마무리를 재촉한다. 또 한 해가 저무는 이때 우리는 무엇을 신뢰하며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앞으로 무엇을 의지하며 의미 있게 살아갈지 돌아볼 소중한 시간을 맞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살아야 할 숙명을 타고난 나는 과연 "그 누구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존재"로 살아왔는지, 또 나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할 대상"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볼 때이기도 하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