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작 연대기(91)] 박진희(상명대 명예교수, ·국가무형유산 ‘태평무’, ‘처용무’ 이수자), 전승자의 실기 경험을 학술적 기록으로 연결하다
이미지 확대보기박진희의 '강선영 살풀이춤의 무보 체계화를 위한 연구'(2026)는 강선영류 '살풀이춤'의 움직임을 장단별로 구분하고, 구체적인 춤사위와 디딤새, 수건 사용법을 분석해 무보로 정리한다. 미국 링컨센터 공연(2006)과 '강선영 불멸의 춤'(2014) 등의 실연 영상과 관련 움직임 자료, 전문가 자문을 활용하여 춤의 구조를 확인하고 기록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개별 동작이 어떤 순서와 원리로 연결되고 전체 춤의 정서를 형성하는지 밝히는 연구라서 의미가 있다.
연구의 핵심은 춤을 느린 살풀이춤과 자진 살풀이춤, 다시 느린 흐름으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살피고, 각 장단에 따른 동작의 변화와 연결 방식을 구체화하는 데 있다. 비빔 디딤과 180도 회전 사위, 팔을 올린 좌우새, 수건 뿌리기·넘기기·던지기, 인사 사위 등 주요 춤사위를 세분화해 기록함으로써 강선영류의 신체적 특징을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이러한 작업은 전승자의 기억과 구술에 의존하던 춤의 일부를 비교·검토할 수 있는 자료로 전환된다.
무보의 의미는 동작의 외형 도식화에 그치지 않는다. 발의 디딤에서 발생한 힘이 무릎과 몸통, 어깨와 팔을 거쳐 수건의 움직임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중심과 균형이 이동과 회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호흡과 장단의 변화가 춤의 정서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디딤의 미세한 차이는 수건의 속도와 곡선, 신체의 방향과 공간 동선까지 변화시킨다. 박진희의 무보 연구는 신체의 운동 원리와 표현 구조를 밝혀 깊은 학술적 성과가 되었다.
강선영(姜善泳, 1925~2016)은 '태평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예술세계에는 독자적인 미학을 형성한 '살풀이춤'도 자리한다. 강선영과 한영숙(1920~1989)은 모두 한성준(1874~1941)에게 춤을 배웠으나, 스승의 전통을 각자의 신체적 특성과 예술적 해석에 따라 발전시켰다. 한성준이 전통춤을 정리하고 무대화한 토대 위에서 강선영은 절제된 움직임과 섬세한 호흡, 장단에 따른 역동성을 결합해 자신만의 춤 세계를 구축했다.
박진희의 연구는 전승 과정에서 형성된 강선영류의 독자성을 구체적인 움직임의 구조를 통해 확인하게 한다. 전통춤의 계보를 밝히는 일만으로는 한 유파의 예술적 개성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같은 전통에서 출발했더라도 디딤의 방식과 호흡의 길이, 수건의 운용, 공간의 구성, 종결부의 정서적 처리에 따라 춤의 인상과 미학은 달라진다. 강선영류 '살풀이춤'의 정체성은 춤사위와 장단의 구성, 움직임의 연결 원리를 대조·분석하는 과정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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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강선영은 무용연구소를 설립(1953)하고 강선영무용단을 창단(1960)해 전통춤의 전승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성준 선생, 그 춤의 재현'(2000)에 선무·승무·바라춤·즉흥무·검무·한량무·훈령무·장고춤·태평무 등 아홉 종목이 무대에 올랐다. 이러한 활동은 전통의 보존이 무대예술로 재구성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창조적 실천임을 보여준다. 박진희의 연구 역시 강선영의 실연과 교육을 통해 전해진 춤을 기록하고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전승의 연장선에 놓인다.
'살풀이춤'은 무속적 의례에서 비롯된 정화와 해원의 정신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춤이다. 맺힌 원과 슬픔을 풀어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를 화해시키고, 고통받는 인간의 내면을 정화하는 데 그 근원적 의미가 있다. 무대 위의 '살풀이춤'은 의례적 기능을 넘어 인간의 상처와 갈등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드러내고, 이를 성찰과 해방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예술로 확장된다. 박진희는 2026년 10월 18일 서울 성균소극장에서 강선영류 '살풀이춤'을 드물게 보여주었다.
강선영류 '살풀이춤'의 미학적 특징은 한과 슬픔을 직접적으로 분출하기보다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적절한 순간에 이를 풀어내는 데 있다. 긴장과 이완, 응축과 확장, 고요와 역동성이 교차하면서 춤은 정서적 깊이를 획득한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여도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기운이 흐르는 정중동의 원리가 작동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감정을 단순히 표현하는 것을 넘어 다스리고 승화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수건은 미학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핵심 매개다. 수건 뿌리기와 넘기기, 던지기, 어깨에 메기 등의 동작은 감정의 표출이며 공에 기운을 펼쳐 보이는 조형적 행위다. 수건의 궤적은 팔의 움직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발의 디딤과 무릎의 굴신, 몸통의 회전, 어깨의 방향, 호흡의 길이가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고유한 곡선과 속도가 만들어진다. 박진희가 디딤새와 수건 사용법을 함께 기록한 작업은 신체와 도구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단서를 제공한다.
장단의 변화는 춤의 내적 흐름을 결정한다. 느린 장단은 감정의 응축과 성찰을 이끌고, 자진 장단은 축적된 기운을 역동적으로 드러내며, 다시 느린 흐름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정서적 해소와 완결을 지향한다. 이때 종결은 맺힌 감정이 풀리고 신체의 긴장이 정리되면서 춤의 의미가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이루는 순간이다. 강선영류 '살풀이춤'의 독자성은 이러한 장단의 구성과 춤사위의 연결, 수건의 운용, 공간 동선과 종결 방식이 함께 작용하는 데에 있다.
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강선영의 춤에서 맺힘과 풀림의 정서적 변화,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발현되는 신명의 의미를 강조한다. 김지원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또한 풀림을 자아의 성숙으로 이어지는 성찰의 과정으로 해석한다. 이들의 관점은 강선영류 '살풀이춤'을 인간 내면의 변화를 구현하는 신체예술로 이해하게 한다. 박진희의 연구는 이러한 미학적 해석을 구체적인 움직임의 분석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실기와 이론을 잇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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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무보는 전통춤의 구조를 보존하고 교육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유용하지만, 춤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신체에 축적된 감각과 호흡, 장단에 대한 반응,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직접적인 교감은 문자나 도식만으로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따라서 영상과 무보, 구술 자료를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하고, 기록된 움직임을 실제 실연과 교육 현장에서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와 후대 전승자의 해석을 구분해 기록할 필요가 있다.
박진희의 연구는 장단별 동작의 기록, 호흡과 시선, 신체 중심의 이동, 수건의 공간적 궤적, 정서적 변화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다. 한성준에서 강선영으로 이어지는 전승의 역사와 다른 유파의 움직임을 비교해 강선영류만의 특징을 규명한다. 무보의 실제 교육에서의 활용도, 기록된 춤사위와 전승자의 실연과 일치 정도를 검토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 같은 연구가 축적될 때 무보는 보존 자료를 넘어 전통춤의 미학을 해명하는 학술적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박진희의 연구는 몸으로 전해진 전통을 분석과 기록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춤사위와 디딤새의 구체적인 구조를 통해 유파의 독자성을 밝히는 작업이다. 전승자의 실기 경험을 학술적 기록으로 연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향후 교육과 비교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서도 발전 가능성을 지닌다. 기록의 완성도는 무보의 세밀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연과 기록의 상호 검증, 전승 과정에 대한 사적 고찰, 신체미학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강선영류 '살풀이춤'의 가치는 한과 슬픔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풀어내며 새로운 삶의 기운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절제된 호흡과 섬세한 디딤, 수건의 유려한 곡선은 내면의 갈등을 움직임의 질서로 바꾸고, 맺힘을 풀림으로, 응축을 확장으로 이끈다. 박진희의 기록 작업은 이러한 미학을 구체적인 춤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힌다. 나아가 자신이 직접 강선영류 '살풀이춤'을 연행하면서 춤의 소중함을 알린다.
전통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보존한다고 해서 저절로 살아남지 않는다. 원형을 존중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정신과 움직임의 원리를 이해하고, 실연과 기록을 통해 지속적으로 검증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박진희의 연구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강선영류 '살풀이춤'의 예술적 가치를 다시 드러내고, 전통춤의 다양성과 깊이를 새롭게 조명한다. 안개 속에서 춤이 자신의 빛을 얻듯, 기록을 통해 밝혀진 춤의 원리는 전승의 미래를 비추는 등대로 기능한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박진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