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작 연대기(90)] 정유진(부암아트센터 대표, 부암공연예술제 예술감독, 부산과기대 교수)이 묻다... "오늘날 영웅은 누구이며, 예술은 무엇으로 시대와 관계 맺는가"
이미지 확대보기이번 예술제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오늘날 영웅은 누구이며, 예술은 무엇으로 시대와 관계 맺는가. ‘HERO’는 비범한 능력이나 극적인 성취를 지닌 인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타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창작자, 무대 위의 언어에 응답하는 관객까지 영웅의 범주에 들어온다. 영웅을 개인의 탁월성에서 관계의 윤리로 이동시키는 이러한 시선은 예술을 고립된 표현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는 행위로 바라보게 한다.
예술은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창작자의 신체와 사유가 공간을 만나고, 작품이 관객의 감각과 충돌하며, 서로 다른 장르의 언어가 교차할 때 작품은 최초의 의도를 넘어선 의미를 얻는다. 이번 예술제의 가치는 다양한 공연을 한자리에 모으는 데만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창작 방식이 자신만의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타자와 마주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는 데 있다. 공연을 감상하는 시간은 작업을 이해하고, 질문을 나누며, 다음 창작을 상상하는 시간으로 확장된다.
장소는 배경이 아니라 예술의 조건이다. 서울 종로는 역사와 전통의 흔적 위에 현대 문화의 실천이 중첩된 지역이다. 그중 부암동은 미술관과 갤러리, 공연공간, 주거지와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독자적인 문화적 풍경을 형성해 왔다. 이곳에서 장소는 작품을 수용하는 물리적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공간의 기억과 분위기, 관객의 이동, 일상의 리듬은 공연을 경험하는 방식에 개입하며 작품의 의미를 구성한다.
제2회 부암공연예술제는 이러한 장소성을 공연예술의 맥락으로 끌어들인다. 문화시설이 밀집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기존의 공간들을 새로운 예술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려는 것이다. 이는 지역을 소비와 관람의 대상 관행에서 벗어나, 예술적 사건이 발생하고 새로운 관계가 축적되는 현장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다. 다만 장소의 잠재력이 실제 문화적 성과로 이어지려면 공간 간의 연계가 지속적이며 협업과 관객의 참여로 구체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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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정유진 예술감독의 예술적 관점은 현대무용의 신체 인식과 맞닿아 있다. 현대무용에서 출발한 관계의 미학, 무용에서 몸은 이미 정해진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움직임은 공간과의 거리, 다른 신체와의 접촉, 리듬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의미를 생성한다. 한 몸의 움직임은 다른 몸의 반응을 유도하고, 그 반응은 다시 새로운 장면을 만든다. 여기서 관계는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차이와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창작의 조건이다.
예술감독이 강조하는 ‘연결’도 단순한 결합과는 다르다. 각자의 고유성을 지우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일, 그 과정에서 익숙한 표현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서로 다른 장르와 세대가 한자리에 모인다는 사실만으로 예술적 교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차이를 드러내고 이해하며, 기존의 창작 문법을 의심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축제의 성패는 참여자의 숫자보다 그 만남이 실질적인 예술적 변화로 이어짐에 있다.
정유진에게 예술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솔직한 외침이다. 서로의 목소리가 모이고, 그 외침이 다음 작품과 세대로 이어지는 기반이다. 그녀에게 ‘HERO’는 일방적 숭배의 명칭이 아니다. 예술가와 관객, 공간과 지역이 서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지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영웅성이란 특별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찬사가 아니라, 타인의 고유 목소리를 존중하고 서로의 불완전을 보완하며 도래하지 않은 예술의 가능성을 함께 열어가는 공동의 실천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안무 작업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상(李箱)의 연작시 '오감도'를 현대무용의 언어로 재해석한 '오감도: 까마귀가 내려다본 세상'(2024), '7인의 아해'(2025)를 비롯해 '8음'(2023), '우리의 속도'(2026) 등은 문학과 철학의 관념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번역하려는 창작의 흐름을 보여 준다. 특히 '우리의 속도'는 이상의 '시제 2호'를 바탕으로 시간과 존재, 순환과 계승의 문제를 탐색한다.
영웅성이란 특별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찬사의 언어가 아니라, 타인의 고유한 목소리를 존중하고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예술의 가능성을 함께 열어가는 공동의 실천이다. 이는 예술이 개별 창작자의 독창성을 넘어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열린 과정이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차이를 지우지 않은 채 공존의 감각을 확장할 때 비로소 한 시대의 정직한 목소리가 미래를 향한 예술적 연대로 전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번 예술제는 공연의 종결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공연 이후의 시간에도 주목한다. 작품상 창작지원금 200만 원, 연출상 50만 원, 안무상 50만 원을 통해 우수 작품과 창작자의 후속 작업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는 공연을 발표의 종착점이 아니라 다음 창작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바라보려는 취지다. 한 편의 작품이 다른 무대에 오르고, 축제에서 형성된 관계가 새로운 협업으로 이어질 때 예술적 경험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지역의 문화적 자산으로 축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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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물론 지원금과 시상만으로 지속 가능한 창작 환경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창작자가 다음 작품을 준비할 시간과 공간, 동료와의 지속적인 교류, 관객을 다시 만날 기회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부암공연예술제가 지향하는 ‘공연 이후’는 선언을 넘어 장기적인 지원과 협력 구조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축제의 성과는 막을 내리는 순간보다 그 이후에 어떤 창작이 이어지는가를 통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서로의 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하는 영웅, ‘HERO’는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하는 주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각자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타인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이때 영웅성은 개인의 절대적인 능력보다 타인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누군가의 창작을 지지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알아보는 행위 역시 영웅의 의미를 구성한다.
제2회 부암공연예술제가 무용과 연극,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언어를 통해 시도하는 것은 결국 관계의 재구성이다. 몸과 공간, 예술가와 관객, 지역의 기억과 동시대의 감각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 과정에서 부암동은 단순한 개최지가 아니라 예술이 발생하고 관계가 축적되는 하나의 문화적 장으로 의미를 얻는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창작과 공존의 가능성을 물었던 부암공연예술제는 다 장르로 확장할 필요성을 남겼다.
예술의 힘은 이질적 목소리가 이어지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그 차이가 차기작의 동력이 되도록 함에 있다. 부암공연예술제의 ‘HERO’가 설득력을 얻는 순간은 영웅을 공연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가 남을 때이다. 관계의 지속 속에서 예술은 공동의 사유와 실천으로 확장되며, 한 사람의 창작이 다른 사람의 영감이 되고 오늘의 만남이 내일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순환으로 지역의 문화적 지형을 새롭게 형성하는 힘이 될 것이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부암공연예술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