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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와 바실리 플레노프 '모스크바의 뒷마당'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정진규의 시를 읽으면 화가 고흐의 숨결이 느껴진다. 화가의 시선과 시인의 붓질이 가만히 좋아하는 곳. 그 곳이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정진규의 ‘별’은 고흐의 로 살피자면 어두운 거리를 활보하는, 테라스를 차지할 수 없는 사람들 위로만 문득 보이거나 머무는 별로 존재한다...시인 정진규가 시를 그려내는 솜씨, 즉 붓질이 마르는 지점에 아예 화가 고흐의 (1885년 作) 이미지가 시상으로 거미줄처럼 걸린다. 그물로 펼쳐진다. 하염없이 그림을 연상케 초대한다. 그래서 시 읽는 기쁨은 곧바로 불편해진다

이진우 기자

기사입력 : 2021-06-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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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바실리 드미트리비치 플레노프 ‘모스크바의 뒷마당’,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 트레차코프술관.이미지 확대보기
바실리 드미트리비치 플레노프 ‘모스크바의 뒷마당’,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 트레차코프술관.

시인 정진규(鄭鎭圭, 1939~2017) 선생님. 그가 생전에 발표한 한 편의 산문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라는 명시는 아직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벌써, 30년! 이제야 시 읽는 기쁨을 맛본다. 한심하다. 난 그래서 철부지일 테다. 명시는 정진규 시집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문학세계사, 1990년)에 보인다. 시집 제목이 된 표제시도 여기서 한번쯤 짚고 살피자. 자, 이렇다.

별 /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말하자면 지배계급에 속한 최상류층으로 극소수의 정치인과 재벌가의 사람들일 테다. 그런 까닭에 그들에겐 밤은 편치가 않다. 밤이면 빛나는 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일조차 노동이라고 멸시할 테다. 도통 무관심할 테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진규의 시를 읽으면 화가 고흐의 숨결이 느껴진다. 화가의 시선과 시인의 붓질이 가만히 좋아하는 곳. 그 곳이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정진규의 ‘별’은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로 살피자면 어두운 거리를 활보하는, 테라스를 차지할 수 없는 사람들 위로만 문득 보이거나 머무는 별로 존재한다. 또 ‘추억’은 어떠한가. 그 부분을 여기에 옮겨다 소개한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추억 / 정진규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식구들은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말없이 먹었다

신발의 진흙도 털지 않은 채

흐린 불빛 속에서

늘 저녁을 그렇게 때웠다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시인 정진규가 시를 그려내는 솜씨, 즉 붓질이 마르는 지점에 아예 화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 作) 이미지가 시상으로 거미줄처럼 걸린다. 그물로 펼쳐진다. 하염없이 그림을 연상케 초대한다. 그래서 시 읽는 기쁨은 곧바로 불편해진다. 또한 유년시절 ‘나’의 과거로 회귀하고, 아울러 1970년 서민이 사는 동네 주택에는 욕실 있는 화장실이 없었기에 너나없이 공휴일엔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라고 대못을 박은 것이다. 그것은 지금 빛바랜 추억의 앨범으로 방구석 어딘가에서 먼지로 수북이 쌓이고 있을 테다.

미술을 테마로 한 여행에 관한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는 최상운 작가의 <우리가 사랑한 고흐>(샘터, 2012년)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다음이 그것이다.

고흐가 특히 애정을 가진 자신의 그림은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 그림을 테오에게 보내며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낸다.

나는 램프의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를 향해 내미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파고 농사를 지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이야말로 자신의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한다. …… 언젠가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거야.

고흐의 뉘넨 시기의 작품 중에서 대작에 속하는 이 그림은 그의 표현대로 “베이컨, 연기, 찐 감자 냄새”를 풍긴다. 빈센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실제로 농부의 집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이들을 가까이에서 살펴봤다. 우리가 세련된 도회 생활에서 벗어나 흙투성이 농부들의 식탁에 앉길 원한 것이다.
(같은 책, 23~25쪽 참조)

어두운 방구석. 찐 감자로 저녁을 때웠던 가족들은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문밖으로 나갔을 테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보였기 때문일 테다. 그렇다. 가난한 그들 식구들에게 있어서 밤하늘의 수없는 별이란 ‘희망’을 발견하는 숫자일 테고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노력의 반짝임 그 자체일 테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그때 그 시절은 모두 ‘추억’의 빛바랜 사진으로 겨우 남을 테다.

가난이 머무는 집, 그 마당에 놀고 있는 햇볕


쥘 브르통 ‘하루 일과를 끝내고’,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뉴욕 브루클린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쥘 브르통 ‘하루 일과를 끝내고’,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미국, 뉴욕 브루클린미술관.

나는 한때 이발소집 아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이발소 그림을 많이 보고 자랐다. 이발소 그림이란 것이 대개 꿀꿀 돼지들이 등장하는 그림이 많았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물었을 테다. 왜 하필이면 돼지냐고?

그랬더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얘야, ‘돼지’를 봐라. 외쳐라. 그럼 ‘되지’라고 발음이 되잖니.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된다고 생각해야 돼. 그래야 성공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내가 고작 열 살 때, 부자유친 추억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가난한 시인이 농사를 짓는 동생 집에 방문했다. 농부인 아우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불쑥 끼어들며 덤벼드는 철학적인 질문이 무심하게도 하나 있었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라는 그 말! 말하자면 영감을 얻어 충격을 받은 시인은 한 편의 산문시를 완성한다. 그리하여 이렇듯 인생이란 해답을 찾기에 마침내 다다른다. 앞서 소개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라는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의 설명은 이랬었다. 설명에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다. 하여 여기에다 옮긴다.

전체가 하나의 연으로 이루어진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정진규 시인의 산문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화자는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던 농사꾼 아우의 말을 떠올린다. 나락도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 장에 내고, 참깨도 털어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한 늦가을임에도 아우는 놀고 있는 햇볕을 아까워한다. 왜냐하면 햇볕은 무언가를 살려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고 있는 햇볕도 쓸모가 있듯 세상에는 버릴 것이 없다. 그러나 화자는 그동안 ‘버린다’, ‘비워 낸다’는 말이나, 욕심을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는 말을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나는 놀고 있는 햇볕조자 버릴 것이 없다는 농사꾼 아우의 마음가짐이라면 세상에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이에 나는 지천으로 놀고 있는 햇볕이 안타까운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젖어있는 사람들’이라 칭하며 스스로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기를 권한다.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시를 읽고 나면 드는 내 생각은 말인즉 옳다구나, 그리고 한 차례의 박수였다. 그러면서 최근에 짬짬이 읽고 있는 선동기 작가의 <나를 위한 하루 그림>(아트북스, 2012)에서 처음 본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이미 앞서 소개한 ‘모스크바의 뒷마당’이란 그림에서 시가 턱하고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러시아 사실주의 풍경화가 바실리 드미트리비치 플레노프(Vasily Dmitrievich Polenov, 1844~1927)에 대한 선동기의 간략한 소개를 그대로 적자면 이렇다.

러시아에서 파리로 유학을 간 플레노프가 가장 감명을 받았던 것은 야외에서 작업하는 프랑스 화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은 풀레노프가 풍경화로 마음이 기울게 된 계기였지요. 그는 귀국 후 러시와와 터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종군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또 왕립 아카데미 시절부터 교유하고 있던 화가들과 함께 이동파 전시회에 참가합니다. 이때 출품한 <모스크바의 뒷마당>은 외광파 기법을 이용해 러시아의 전통적인 풍경에 서정을 듬뿍 담아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외광파 기법이 러시아 최초로 소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같은 책, 145쪽 참조)

이 그림에 대해서 선동기 작가의 설명을 보자면 이렇다.

멀리 보이는 교회의 건물들도 말쑥하지만 모스크바의 뒷마당에도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닭 모이를 주러 나온 아주머니, 풀밭에서 혼자 우는 아이, 놀기에 바빠 동생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고 신이 난 아이들…. 모두 우리 사는 모습이죠. 근사하고 멋진 교회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화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르는 찬가가 햇빛 가득한 마당에 흐르고 있습니다. (같은 책, 143쪽 참조)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그림 속에서 정진규 시의 화자가 닭 모이를 주러 나온 아주머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공감을 할 테다. 그렇기 때문에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라는 말을 연신 쏟아내면서 부모들은 열심히 노동을 하고, 가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을 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우리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걸까?

세습이 어디 부(富)와 권력에만 있었던가


세습이 어디 부(富)에만 한정하던가. 아니다.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들도 가난을 답습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서는 허망하게도 자꾸만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헤아리고자 한다. 그러는 것은 부모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런 일말의 ‘희망’조차 없다면 하루라도 견딜 수 없고 무너지기 때문일 테다. 오로지 내 가정을 지키고자 함 때문이다.

고흐가 존경한 밀레 보다 당시에 더 인기가 높았다는 프랑스 화가, 쥘 브르통(Julles Breton, 1827~1906)도 농민을 대상으로 한 그림으로 유명했다. 브르통의 <하루 일과를 끝내고>라는 그림을 보자. 그림을 살피면 알겠지만, 아직 햇볕이 쨍쨍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감자 수확을 마치고 삽자루를 허리춤에 끼고 등짐을 어깨에 메고 터벅터벅 집을 향해 걸어가는 아주머니 셋이 보인다. 이를 어쩔 거나. 정진규 시에 등장하는 아우가 이 장면을 본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나! 궁금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이렇게 말하면서 혀를 끌끌 찼을 테다. 아무튼 난 저 명화를 이발소 그림으로 낮게 평가하고 싶다. 돼지 그림을 보면서 새마을 운동 시절에 내 아버지가 ‘되지!’라고 막연히 혹세무민(惑世誣民)한 것처럼, 햇볕이 아깝다, 해서 열심히 일한다면 뭔가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 따위를 품게 만드는 여전한 정치적인 논리. 이 논리가 아직도 내가 사는 21세기에도 농민과 서민 사이에서 보수적인 입장이 되고 있어서다.

이와 관련, 미술평론가 이진숙의 책 <시대를 훔친 미술>(민음사, 2015년)엔 볼만한 글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

브르통의 <하루 일과를 끝내고>는 감자 수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민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밀레의 <만종>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 종소리에 맞춰 기도하는 농민 부부의 발치에 있던 것도 감자 바구니였다. 후에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농가의 저녁 식사 장면을 그렸다. 이 무렵 이렇게 그림 속에 감자가 반복해서 등장했던 이유가 있다. 이웃 나라 아일랜드에서 1846~1851년 사이에 감자마른잎병이 퍼져 나가면서 감자 농사에 흉년이 들었다. 이로 인해 100만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소위 ‘감자 기근’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여인들이 들고 가는 감자는 19세기 가난한 빈민층을 먹여 살린 귀중한 식량이었다. (같은 책, 303쪽 참조)

아무튼 감자. 찐 ‘감자’라도 배불리 먹고 싶었던 시절이 19세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20세기 한국에도 엄연히 있긴 있었다. 이를 기억해야 한다. 감자는 자칫 ‘減資’로 읽혀지기 십상이다. ‘감자’라는 말을 좋아하게 되면 어쩌면 내 재산도 ‘감자’가 될 수 있어서다.

우리 시대의 뛰어난 소설가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창비, 2005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다시 표절 시비를 거론하고 싶진 않다. 다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울”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라는 이야기를 괜시리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정진규의 시가 감명깊게 읽히는 이유는 철저한 자기반성, 질의응답 식의 철학적인 시 읽기를 요구한다는 것에 있다. 이 점이 새삼 중요하다. 지나친 자기 확신과 긍정도 문제이지만 어쩌면 지나친 허무와 패배감도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무력함과 패배감에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라는 시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눈에 들고도 반갑다.

◆ 참고문헌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사, 1990.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신경숙 <감자 먹는 사람들>, 창비, 2005.

최상운 <우리가 사랑한 고흐>, 샘터, 2012.

선동기 <나를 위한 하루 그림>, 아트북스, 2012.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민음사, 2015.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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