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해답의 출발점은 산업단지에 축적된 자산을 다시 바라보는 데 있다. 수십 년 된 산업단지는 낡았지만 결코 쇠락한 빈터가 아니다. 대용량 전력망과 전용 항만, 공업용수와 지하 배관망, 그리고 고압가스와 유체를 능숙하게 다루는 전문 정비인력이 집약된 국가적 인프라다. 개별 생산 설비가 수명을 다하더라도 이 물리적 기반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설비 가동 중단이 곧 철거나 부지 확보를 뜻하지는 않는다. 환경정화 비용의 분담과 부지 전환 절차를 미리 정해 활용 가능한 자산을 가려낸다면, 그 자리는 신산업이 닻을 내릴 경쟁력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그 재편의 중심축에 에너지를 놓아야 한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양의 안정적인 무탄소 전력을 요구하고, 고부가가치로 전환하는 정밀화학과 제조업은 탄소 배출과 비용을 함께 낮출 전력과 공정 증기(Steam)를 필요로 한다. 필요한 에너지를 경쟁력 있게 공급할 수 있는 지역이 새로운 산업을 유치할 기회를 먼저 잡는다.
소형모듈원자로(SMR), 데이터센터, 청정수소 생산을 연계하는 구상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SMR은 수요지 인근에서 전력과 열을 함께 공급하는 전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노형과 공급 온도에 따라 산단의 공정 증기를 공급하고, 고온 수전해에 필요한 증기 생산에도 열을 활용할 수 있다. 전력은 AI 데이터센터와 산단에 공급하되, 열 공급량과 추가 가열에 필요한 에너지를 함께 따져야 한다. 에너지 인프라가 신산업을 부르고, 유치된 기업들의 장기 전력·열 구매계약이 초기 투자 위험을 덜어주는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초도호기의 발전단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비용 위험을 수요기업·사업자·정부가 어떻게 나눌지 함께 설계해야 하고, 화학설비의 화재·폭발 위험을 반영한 안전성 평가와 주민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
세 거점에 천편일률적인 시설을 복제할 필요는 없다. 각 산단이 지닌 산업적 DNA에 맞춘 설계가 요구된다. 울산은 동해가스전 CCS 실증 추진과 자동차·조선 수요를 바탕으로 한 청정수소·암모니아 도입 터미널과 에너지 허브로, 여수는 고밀도 크래커 단지의 스팀 수요를 대체하는 공정열 탈탄소화 거점으로, 대산은 수도권 인접성을 살린 AI 데이터센터 거점으로 특화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은 SMR 완공 시점까지 미룰 일이 아니다. 정부가 경수형 SMR의 2035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는 만큼, 그 이전에는 분산특구의 열병합발전 전력 직접공급 등 기존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부지 정비와 배관망 공용화, 장기 수요기업 협의는 당장 시작해야 한다. 배관과 압력용기, 방폭 설비를 다루어온 산단의 현장 숙련은 재교육과 원자력 품질 인증을 거치면 SMR과 청정수소 설비 정비로 이어질 핵심 자산이다. 설비의 이름은 바뀌어도 공정 엔지니어링의 본질은 이어진다. 지역 중소 협력업체가 플랜트 제작과 정비, 디지털 안전 운영에 참여할 때 지속 가능한 일자리의 기반이 마련된다.
정부는 석유화학특별법, SMR특별법, 분산에너지법이 따로 움직이지 않도록 세 거점을 아우르는 통합 전환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미 지정된 울산·서산 분산특구의 전력 직접거래 기반을 활용하고, SMR·수소 사업에 필요한 입지·안전·인허가 제도를 연계하며 산단 부지의 전환 절차를 정비해야 한다. 설비 감축을 논의하는 지금부터 다음 산업의 입지와 무탄소 에너지 공급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공장이 완전히 비워진 뒤에 새로운 용도를 찾기 시작한다면 기업과 사람을 붙잡기에는 이미 늦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