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러 경쟁의 전면화, 기술·군수 공급망의 재편, 확장억제 체계의 구조적 변동 속에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자율적 억지·기술안보·전략동맹의 새로운 프레임
이미지 확대보기미국 의회가 2026년 회계연도 국방 예산으로서 사상 최대 규모인 9000억 달러(약 1324조1700억 원)를 승인하려고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지금의 그 같은 움직임이 단지 방위비 확대로 볼 것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구조 자체가 재편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 내부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와 미 의회가 공통으로 내리는 결론은 하나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의 시간이 본격적으로 도래했고, 미국은 이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군사력 중심의 세계 전략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압력은 아시아와 유라시아 전장을 동시에 흔들고 있으며, 한국은 그 한가운데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고 있다.
미국 의회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전략적 합의
미국 의회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을 뛰어넘는 규모로 국방 예산의 규모를 증액하며 유럽과 인도·태평양에서의 군사적 약속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검토해온 유럽 주둔 미군의 감축 가능성을 입법적으로 차단한 것은 공화·민주 양당의 현실주의적 판단이 정확하게 반영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동시에 군사·기술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전선을 축소하면 국제 질서의 균형이 즉시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가 미 의회 전체를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와 경영대학원 명예 교수로 국제안보 전략과 핵전략의 권위자인 폴 브래컨(Paul Bracken)이 말한 “대륙 전체가 하나의 전략 공간으로 연결되는 신냉전의 지형”이 의회 문서 곳곳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번 국방 예산안은 바로 그 신냉전을 제도적·재정적으로 고착화하는 문서다.
미국의 군산복합체 재가동과 기술패권 전쟁의 가속
법안은 무기 조달 체계를 다시 설계하고 공급망을 군사동원 체제에 맞게 재편하려는 의도가 선명하다. 드론 생산 가속, 미사일 방어체계의 전면 개편, 방산 공급망의 민군 통합 구조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노출된 미국의 군수 생산력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전략기술을 겨냥한 투자 금지 조항이다. 인공지능·반도체·군사용 이중용도 기술 분야로 미국 자본이 흘러가는 경로를 차단하려는 결정은 단순한 제재가 아니라 기술패권 전쟁을 전면전의 단계로 올려놓는 조치이다. 이는 미 외교안보 전략가들로서 각각 존스홉킨스대와 터프츠대 국제정치 교수인 할 브랜즈와 마이클 백클리가 지난 22년 출간한 '위험지대(Danger Zone)'에서 경고한 “디지털 시대의 봉쇄 전략”이 법률로 굳어지는 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의 의미와 유라시아 전선의 고착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중 연도 군사 지원은 전쟁 장기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결정이다. 유럽은 이미 러시아와의 전략적 충돌에서 후퇴할 여지를 잃었고, 미국은 이 전쟁이 인도·태평양 전략의 지렛대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선이 무너지면 중국은 대만 해협과 남중국해에서 훨씬 과감한 행동을 감행할 수 있고, 이는 미국의 글로벌 억지력 붕괴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트럼프 행정부의 기류와 상관없이 의회가 이 지원을 강행한 것은 미국 내에서 유라시아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략적 공감대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즉, 미국 정치의 분열은 전략의 분열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에게 다가오는 구조적 압력
미국의 전략 재정렬은 한국 안보 환경에도 중대한 함의를 남긴다. 첫째,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견제하는 이중 봉쇄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은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둘째, 미국의 군산복합체 재가동은 향후 한국의 방산 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을 요구한다. 셋째, 대중 첨단 기술 투자 차단 조항은 한국 기업에게도 사실상의 참여 압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반도체·배터리·AI 산업은 이제 선택을 요구받는 국면에 돌입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략 변수는 미국의 확장억제가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한 형태로 유지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미국의 방위 공약은 강화되는 듯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비용 부담 전가와 지역 동맹의 군사 자율성 확대라는 이중 메시지가 동시에 들어 있다. 한국은 이 두 압력을 모두 견디기 어려운 구조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한국의 안보와 국익을 위한 전략적 대응
첫째, 확장억제의 신뢰성 약화에 대비한 독자적 억지력 강화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된 상황에서 한국은 더 이상 외부 억지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전술핵 재배치와 조건부 핵무장 옵션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실제 전략 대안으로 검토해야 한다.
둘째, 공급망 동맹과 방산 협력 체제에서 한국이 주도적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미국의 새로운 군수체제와 기술봉쇄 전략은 한국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군수 생산능력과 반도체 기술력을 결합해 미국의 전략 공급망 내에서 필수적 역할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한국의 외교전략을 미중 중간지대의 균형전략이 아니라 능동적 선택의 전략으로 재편해야 한다. 첨단 기술들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차단하는 재세계화(reglobalization) 시대의 기술·군사 연합 구조는 중립과 모호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브랜즈와 백클리가 앞서의 '위험지대'에서 강조한 대중 패권 전략이 바로 재세계화다. 한국의 국가전략은 미국과의 전략 동맹을 기반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구축하는 지역질서에 대한 실질적 억제력을 갖춘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전략 언어를 다시 써야 할 때
미국의 이번 국방예산안은 세계가 다시 군사력과 기술력이 지배하는 질서로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유라시아와 인도·태평양이 하나의 전장이 되었고, 한국은 그 경계선이 아니라 중앙에 서 있다.
따라서 한국의 선택은 더 이상 지연될 수 없다. 억지력의 재구축, 기술안보의 강화, 방산 산업의 전략적 재편, 그리고 독자 핵능력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한국 안보의 필수 어휘로 자리 잡아야 한다. 국제 질서는 이미 대전략의 단계로 들어섰고, 한국 역시 그 언어를 다시 써야 할 시점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