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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K-뷰티, '한류' 타고 세계 2위 수출국 도약…상반기 화장품 수출 55억 달러 돌파

미국·유럽 시장서 폭발적 성장…틱톡 주간 2억5천만뷰 '문화 파급력' 확대
아모레퍼시픽 서구권 매출 2배↑…설화수·라네즈 중심의 프리미엄 수요 폭발
서울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의 럭셔리 스킨케어 브랜드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의 화장품 진열대. 사진=아모레퍼시픽이미지 확대보기
서울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의 럭셔리 스킨케어 브랜드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의 화장품 진열대. 사진=아모레퍼시픽

1991년, 서경배 현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28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를 찾았다. 가업인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에 합류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그가 마주한 것은 프랑스의 허름한 약국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쓴 채 팔리지 않는 자사 스킨케어 제품들이었다.

서 회장은 즉각 전량 철수를 결정했다. 현대 화장품 산업의 심장부인 프랑스에서 '싸구려'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을 감수할 수 없었다. 서 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시장에서 인정받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며 "그때 한국 브랜드는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K-뷰티의 위상은 상전벽해 수준이다. K-팝, 영화, TV 드라마, 나아가 음식까지 전 세계를 휩쓴 '한류(Hallyu)'의 물결을 타고 한국 화장품이 글로벌 뷰티 시장의 주류로 급부상했다. '유리 피부(glass skin)', 여러 단계로 구성된 스킨케어 루틴, 달팽이 점액(snail mucin) 세럼 같은 K-뷰티 트렌드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핵심 화두로 자리 잡았다.

가시적인 성과는 수출 지표로 증명된다. 2025년 상반기, 한국은 미국을 제치고 프랑스에 이어 세계 2위의 화장품 수출국으로 등극했다. 한국 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이 기간 화장품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한 55억 달러(약 8조 원)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은 전통적인 아시아 시장을 넘어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의 약진이 강력하게 견인했다.

이러한 지각변동의 중심에는 K-뷰티의 맏형 격인 아모레퍼시픽이 있다. 내수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아모레퍼시픽은 이제 명실상부한 '수출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고 있다. 지난해 아모레퍼시픽의 북미 및 유럽을 포함한 서구권 매출은 두 배 이상 급증했다.

한때 '틈새시장'으로 분류되던 K-뷰티 제품들은 이제 미국 전역의 세포라(Sephora), 월마트(Walmart) 매장은 물론 유럽 주요 유통망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내 1400개 이상의 매장을 보유한 대형 유통사 울타 뷰티(Ulta Beauty)는 지난 7월 K-뷰티 제품군 확대를 공식 발표했다. 한국 최대의 H&B 스토어인 올리브영(Olive Young) 역시 내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1호점 개장을 준비하며 현지 시장 공략을 예고했다.

글로벌 시장의 확장은 아모레퍼시픽 산하의 라네즈(Laneige), 럭셔리 라인인 설화수(Sulwhasoo) 등 31개 브랜드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모레퍼시픽 자신이 수백 개에 달하는 후발 K-뷰티 브랜드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타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혁신적인 성분이나 신기술로 무장한 소규모 한국 브랜드들은 시장의 주목을 받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의 제품이라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입소문이 퍼지는 시대다. 소비자 데이터 분석 기업 스페이트(Spate)에 따르면, 틱톡(TikTok)에서 '한국 뷰티' 또는 '한국 스킨케어' 관련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의 주간 평균 조회수는 2억 5000만 회에 육박한다.

'아모레 여사' 신화에서 '한류' 업고 세계로


오늘날의 K-뷰티 신화는 8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주인 고(故) 서성환 선대회장이 회사를 설립한 1945년 9월 5일은 그가 일본군 복무를 마치고 공식 제대한 날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그는 모친이 북한 개성에서 운영하던 가업(동백기름, 로션 등을 제조·판매)을 물려받았다.

'태평양화학'이라는 간판을 내건 서 선대회장은 1947년 서울로 사업 기반을 옮겼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전쟁미망인들을 고용해 방문판매 조직인 '아모레 여사'를 운영하며 한국 내수 시장에서 급성장했다. 1964년 해외 수출을 시작했지만, 이후 수십 년간 글로벌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K-뷰티의 잠재력이 폭발한 것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 TV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한류'와 궤를 같이한다. 1997년 부친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에 취임한 서경배 회장은 "문화가 발전하면 뷰티 산업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문화, 뷰티, 음식, 패션은 서로 상호 수분(cross-pollinate)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진단했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연구소에서 액체 상태의 인삼 농축 분말을 추출하고 있다. 인삼의 핵심 성분인 사포닌은 노화 방지 효능을 지녔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사진=아모레퍼시픽이미지 확대보기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연구소에서 액체 상태의 인삼 농축 분말을 추출하고 있다. 인삼의 핵심 성분인 사포닌은 노화 방지 효능을 지녔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사진=아모레퍼시픽


물론 K-뷰티의 세계화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 중국 시장 개방과 함께 아모레퍼시픽은 상하이에 공장을 짓고 수백 개의 매장을 여는 등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10여 년간 투자는 빠른 매출 성장으로 이어졌지만,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 배치를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이 터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 소비자들의 한국 제품 불매 운동과 시위가 이어졌고, 코로나19 팬데믹은 '차이나 리스크'를 더욱 증폭시켰다. 아모레퍼시픽은 결국 중국 내 대부분의 매장을 폐쇄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미국 시장에서도 새로운 장벽에 부딪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수입 관세 문제였다. 당초 25%에 달했던 관세율은 지난달 15%로 최종 합의되었지만, 비용 부담은 여전하다. 서 회장은 "자유 무역 체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하며 "제품력을 높이는 동시에, 미국 내 현지 생산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관세 장벽에도 K-뷰티의 북미 시장 공략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K-뷰티 전문 이커머스 '소코글램(Soko Glam)'의 창립자 샬롯 조(Charlotte Cho)는 "약 10년 전부터 K-뷰티가 저렴한 약국 제품과 고가의 백화점 브랜드 사이의 공백을 정확히 파고들었다"고 분석했다. 독특한 성분과 기술력을 갖췄으면서도 합리적인 가격대를 제시했다는 평가다. 여드름 패치나 시트 마스크 등이 K-뷰티의 저렴한 '입문용' 제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모레퍼시픽의 미국 시장 '대박'은 의외의 제품에서 터졌다. 라네즈 브랜드가 출시한 '립 슬리핑 마스크(Lip Sleeping Mask)'가 그 주인공이다.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와 유명인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이 제품을 극찬하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2초에 1개씩 팔려나갈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끝없는 혁신 경쟁…'인삼 과학' R&D로 승부


K-뷰티 시장의 경쟁은 본고장인 한국에서 가장 치열하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1인당 뷰티 제품 지출액이 가장 높은 시장이다. 유행 주기가 극도로 빠르고, 그만큼 신생 브랜드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시장에 진입할 기회도 많다. 2024년 기준 한국의 화장품 판매업자 수는 약 2만 8000여 곳으로, 5년 전 대비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최근 K-뷰티 업계는 연어의 정자에서 추출한 DNA 조각인 'PDRN(폴리데옥시리보뉴클레오티드)'이나 세포가 분비하는 미세 기포인 '엑소좀(Exosome)' 등 혁신적인 성분에 주목하고 있다. 몇 년 전 '달팽이 점액' 성분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자, 아모레픽은 이 성분을 유행시킨 소규모 브랜드 '코스알엑스(COSRX)'를 약 7억 달러(약 1조 원)에 인수하며 경쟁력을 흡수하기도 했다.

아모레퍼시픽의 핵심 경쟁력은 '인삼(Ginseng)'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천연 원료에 대한 오랜 연구개발(R&D)에서 나온다. 창업주 서성환 선대회장은 인삼이 인체 내부뿐만 아니라 피부에도 탁월한 효능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1966년 첫 인삼 제품인 'ABC 인삼 크림'을 출시했을 당시, 고농축 인삼 성분이 일부 고객에게 피부 자극을 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는 수십 년간 연구를 거듭해 피부 타입을 가리지 않는 고효능 제품을 개발해냈다.

현재 아모레퍼시픽의 럭셔리 라인인 설화수는 인삼 기반의 세럼, 로션, 아이크림 등을 주력으로 내세운다. 아모레퍼시픽 R&I 센터 연구원들은 직사광선을 피하고 5~15도의 경사지에서만 자라며 4년에 한 번만 수확할 수 있는 인삼의 최적 재배법을 연구한다. 핵심 성분은 노화 방지에 도움을 주는 '사포닌(saponin)'이다.

최근에는 그동안 폐기되던 인삼 잎에 모발 성장을 촉진하는 특정 사포닌이 고농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등 R&D는 현재진행형이다. 조정훈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 수석 연구원은 "인삼은 수천 년간 연구되었지만, 아직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완벽한 피부'에 대한 소비자들의 열망이 K-뷰티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고 있다. 최근 서울의 설화수 플래그십 스토어를 방문한 뉴저지 출신의 알린 프리먼(84) 씨는 "노화 방지, 탄력, 주름 개선 등 우리를 젊게 유지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원한다"며 "주변 친구들이 K-뷰티 제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말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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