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넘어 '피지컬 AI'로…시총 1000조 엔대 로봇 기업 향한 대전환
미 '제조업 부활' 맞물려 부상…일본, 데이터 수집 초목지 전락 우려
미 '제조업 부활' 맞물려 부상…일본, 데이터 수집 초목지 전락 우려

머스크의 주장이 현실이 된다면 테슬라의 기업 가치는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치솟을 것이다. 15일 기준 테슬라의 시가총액은 1조3230억 달러(약 1825조 원)로, 세계 10위이자 자동차 업계 경쟁자인 토요타의 4배에 이른다. 머스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SNS를 통해 시가총액을 8조6000억 달러(약 1경1865조 원)까지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 목표가 이루어지면, 로봇 사업의 가치는 1011조 엔(약 9526조 원)에 육박하며 EV 사업(253조 엔)을 압도한다.
최근 불매 운동 등의 탓에 EV 판매가 주춤하자 일각에서는 그의 발언이 시장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전략이라는 의심도 나온다. 하지만 시장의 평가는 다르다. SBI증권의 엔도 고지 수석 애널리스트는 "이미 로봇에 대한 기대감이 테슬라 시가총액의 70~80%를 차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로봇 사업이 더는 미래의 꿈이 아닌 현재 가치에 깊숙이 반영된 현실이라는 뜻이다.
현실 데이터가 '피지컬 AI' 성패 가른다
테슬라가 개발하는 인간형 로봇 '옵티머스'는 '피지컬 AI(신체를 얻은 AI)'라는 새로운 기술 흐름의 중심에 있다. 피지컬 AI란 인공지능이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신체를 갖고 현실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기술이다.
옵티머스의 혁신은 학습 방식에 있다. 기존 생성형 AI가 인터넷의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는 것과 달리, 옵티머스 같은 로봇은 현실 세계에서 사람과 기계의 움직임을 카메라와 센서로 포착해 데이터로 만들고 이를 통해 배운다. 가상 공간에서 '시뮬레이션'으로 학습하는 기술도 발전했지만,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실 세계에 대처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로봇의 성능을 좌우하는 것은 양질의 현실 데이터 확보다.
테슬라는 옵티머스가 가정은 물론 공장에서 부품 운반, 조립, 마감, 검사 등 다양한 임무를 맡을 것으로 기대한다. 뉴욕타임스는 "10년 후 10억 대의 인간형 로봇이 사람과 함께 사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머스크의 예언을 전하기도 했다. 이 야심 찬 미래를 여는 열쇠는 '어떻게 현실 세계의 데이터를 모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달려있다.
데이터 '자원 대국' 일본, '초목지' 될 위기
인간형 로봇의 잠재 수요는 크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세우는 '제조업 부활' 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은 숙련 노동자 부족과 높은 이직률이다. 한 일본 자동차 제조사에 따르면, 미국 공장에서 100명을 새로 뽑으면 1년 안에 30명이 그만둔다. 30%에 이르는 이직률은 산업 전반의 고질병으로, 기업은 끊임없이 새 인력을 교육해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로봇은 이 문제의 근본 해법이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미 공장 자동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EV 대기업 비야디(BYD)와 샤오미 등은 높은 수준의 자동화를 이루었으며, 앞으로 인간형 로봇을 통해 생산성을 더욱 높이려 한다.
일본의 처지는 복합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장인(匠人) 기술과 기술 전수 체계를 자랑하지만, 이는 일부 대기업의 이야기다. 대다수 중견·중소기업은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머스크는 바로 이 틈새를 파고들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일본은 독일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데이터가 잠들어 있는 '자원 대국'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중요성을 지닌다. 최근 어느 미국 IT 기업은 일본 중소기업에 "제조 공정에 AI 기술을 무료로 줄 테니, 데이터를 수집하게 해달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능 로봇을 만들려면 인터넷에 없는 현장의 '경험지'와 '암묵지'를 AI에 학습시켜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자칫 로봇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는커녕, 세계 기업들의 데이터 수집을 위한 '초목지'로 쓰일 수 있다는 경고다. 일본 정부 역시 안보 차원에서 데이터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해외 기업의 접근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데이터의 약 10%만이 온라인에 있고, 나머지는 공장과 가정 같은 오프라인 공간에 있다. 로봇 개발은 이 미개척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성패가 달려있다. 노무라종합연구소를 보면, 세계적으로 220개가 넘는 인간형 로봇 개발 기업이 경쟁하는데 일본 기업은 20여 곳에 지나지 않는다. 막대한 데이터를 가지고도 로봇 산업화에 불을 붙이지 못하는 일본의 현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데이터는 단순히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기업 가치를 높이는 데 연결할지가 더 중요한 과제가 됐다. 테슬라의 '로봇 회사' 선언은 데이터를 쥐고도 AI와 하드웨어, AI와 제조업을 잇지 못하는 일본의 구조적 약점을 정면으로 겨누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