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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칼럼] ‘작고와 물고’

이정선 기자

기사입력 : 2020-01-2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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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임금 때 최부(崔溥 1454∼1504)라는 관리가 있었다. 최부는 ‘추쇄경차관’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는데,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면서 중국의 절강성 해안까지 밀려갔다.

최부는 이곳에서 북경과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이 ‘표해록(漂海錄)’이다.

이 표해록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명나라 관리와 대화한 내용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필담(筆談)으로 주고받은 대화다.

“몇 년 전에 우리 조선에 왔던 그 관리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가.”

“그는 이미 작고(作故)했다.”

“작고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다.”

“아, 그런가. 우리 조선에서는 작고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물고(物故)라고 한다.”

“물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 죽어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우리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일을 하기 싫어했다고 여겨왔다. ‘양반노릇’에 빠져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아했다고 들어왔다.

하지만 최부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죽고 나서야 일손을 놓을 정도로 일을 했던 것이다.

표해록은 조선 건국 100년쯤 되었을 때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만 해도 우리는 일을 많이 하는 민족이었다.

이 ‘일하는 유전자’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창출’한 노인 일자리가 그렇다.

작년 노인 일자리는 37만7000개 늘었다고 했다. 전체 일자리 증가폭 30만1000개보다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65세 이상 고령자의 일자리는 22만7000개나 늘었다. 많은 대한민국의 늙은이들이 거의 ‘물고’를 할 때까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노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빈곤율 1등’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를 “V자형 반등에 성공한 것”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었다. 취업자 증가, 고용률, 실업 등 3대 고용지표가 모두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 일자리는 21만5000개 줄었는데도 작년을 ‘일자리 반등의 해’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 관리가 최부에게 밝혔던 ‘작고’라는 말의 뜻도 달라지고 있었다.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의 죽음에도 ‘작고’라는 말이 사용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설 연휴 전인 지난 21일 ‘국민과 함께하는 2020 희망공약개발단 반려동물 공약 발표회’를 하는 자리에서 “저도 몇 년 전에 반려동물을 키웠는데 14년 만에 작고하셨다. 보낼 때 가슴이 무겁고 아팠다”고 했다는 것이다.

언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반려동물이 죽어도 ‘작고’다. 그게 아니라면 황 대표의 ‘말실수’였다.


이정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slee@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