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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칼럼] 머리카락 수난

이정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slee@g-enews.com

기사입력 : 2019-09-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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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의종(毅宗) 때 있었던 ‘사건’이다. 의종이 ‘청녕재’라는 곳의 남쪽 기슭에 정(丁)자형 누각을 세웠다. 물오리가 놀고 갈대가 선 것이 마치 ‘강호’의 경치였다.

당초 정자를 지을 때 역군들에게 자기가 먹을 식량을 싸오도록 했다. 그러나 어떤 역군은 집이 가난해서 식량을 준비할 수 없었다. 그러자 다른 역군들이 밥 한 숟가락씩을 덜어서 나누어주어 먹도록 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음식을 싸들고 와서 남편에게 “친한 사람을 불러서 함께 드세요”하며 권했다. 역군은 아무것도 없는 아내가 난데없이 음식을 가지고 오자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다그쳤다.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마련했는가.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여 얻었는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쳐 왔는가.”

아내가 쓸쓸하게 대답했다.

“얼굴이 추하니 누가 나를 가까이하며, 성격이 옹졸하니 어떻게 도둑질을 하겠어요.”

그러면서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식량을 구했을 뿐”이라며 자기 머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역군은 목이 메어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도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고려사’에 나오는 얘기다.

우리는 이렇게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겼다.

‘단발령’이 내려진 것은 고종 임금 때인 1895년이었다. 대쪽 같은 선비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차라리 상투 대신 목을 자르라(吾頭可斷 此髮不可斷)”며 버틴 일화는 유명하다.

단발령은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쳐 경기침체를 불러오기도 했다. 머리를 잘린 사람들이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유통시장이 마비되고 그 바람에 경제 전체가 엉망이 되는 불상사였다.

선비들이 단발령에 반발, 의병을 조직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도 했다. 의병을 조직하게 된 동기 가운데 하나가 머리카락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단발령 31년 후인 1926년에 ‘희한한’ 조사가 있었다. 상투를 얼마나 잘랐는지에 대한 조사였다.

평양은 99%, 목포는 90%, 개성은 89%의 주민이 단발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남원은 단발을 거부한 ‘상투 인구’가 99.2%에 달했고, 괴산 90%, 부여는 85%나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거의 머리를 자르지 않았던 것이다. 30년 넘도록 단발령이 먹혀들지 않은 지역이 적지 않았다.

지금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이른바 ‘삭발 투쟁’을 벌이고 있다. 황교안 대표에 이어 초선의원들도 삭발을 하는 ‘릴레이 삭발’이다. 여성 의원까지 머리를 밀었다. 이를 놓고, 잘하고 있다, 잘못하고 있다는 등의 말이 무성해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의원들에게는 ‘소중한 머리’다. 여성 의원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대체로 칼을 좋아하는 민족은 ‘변발’을 했다. 만주, 몽골, 일본 등이 그랬다. 우리에게도 ‘칼’을 좋아했던 군사정권이 ‘장발족’을 단속했던 과거사가 있다. 당시 젊은이들은 가위를 든 경찰관을 피해 숨바꼭질을 해야 했다.

반면 글을 좋아하는 민족은 ‘속발’이었다.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길러서 잡아 묶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국회의원들의 ‘삭발’은 상당히 ‘전투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명칭도 ‘삭발 투쟁’이다.


이정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slee@g-enews.com

이정선 기자(데스크)jslee@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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