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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처녀치마-봄바람에 살랑이는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기사입력 : 2019-01-09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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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지루한 기다림의 계절이다. 거리엔 빙점 아래로 불어가는 찬바람이 매섭고, 지난 가을 잎을 다 내려놓은 숲의 나무들은 여전히 깊은 침묵에 싸여 있을 뿐 꽃의 기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꽃도 없는 겨울, 무엇을 하며 봄을 기다려야 하나. 나는 기다림이 지루해지면 묵은 사진첩을 뒤적이거나 꽃에 관한 책을 찾아 읽으며 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봄이 찾아오고 세상엔 또 어김없이 봄꽃들이 처음인 듯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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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치마

묵은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보라색 처녀치마에 눈길이 닿았다. 백합과에 속하는 처녀치마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꽃이다. 야생화에 관심을 갖기 전엔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산 어디서나 서식한다고는 하나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하신 몸이다. 습기 많고 비옥한 토양을 좋아하는 처녀치마는 산지의 개울가나 비탈진 산자락을 눈여겨보아야 행운처럼 만나지는 꽃이다.

처녀치마란 이름처럼 꽃 모양이 멀리서 보면 세련된 아가씨의 치마와 흡사하다. 꽃은 자주색, 또는 보라색으로 줄기 끝에서 적게는 3송이, 많게는 10개까지 모여 달려 하나의 꽃 뭉치를 이룬다. 위쪽은 좁고 비스듬히 지면을 향해 넓게 퍼지며 핀 모습이 작고 예쁜 아가씨의 주름치마 같기도 하고, 미니스커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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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치마

꽃만이 아니라 로제트형으로 활짝 펼쳐진 잎도 치마처럼 보인다. 처녀치마는 반상록성이라 겨울에도 땅 위에 방석처럼 펼쳐진 잎들이 남아 있다. 봄이 되면 그 묵은 잎 위로 새잎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운다. 신기한 것은 꽃을 피울 때는 꽃대가 10㎝ 정도로 미처 크기도 전에 꽃부터 피우는 성질 급한 녀석이라 여기기 쉬운데 일단 수정을 한 뒤엔 꽃대가 50㎝까지 훌쩍 자란다. 꽃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씨앗을 조금이라도 널리 퍼뜨리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초봄에 일찍 피는 꽃으로는 노루귀나, 바람꽃, 복수초가 손꼽힌다. 처녀치마도 눈 속에서 피어나는 봄의 문턱에서 만날 수 있는 꽃 중에 하나다. 이 작고 어여쁜 꽃들이 눈 속에 피어난 모습을 보면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올라와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가장 여린 것의 가장 힘센 외침 같다. 이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매운 눈보라를 이기고 봄볕이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추위와 싸웠을까 생각하면 기특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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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치마

꽃을 볼 때마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새들은 먹구름이 드리울수록 세차게 날갯짓하며 날아오르고, 날이 어두울수록 꽃들은 고개를 빳빳이 세운다. 그러고 보면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책 속의 죽은 지식이 아니라 자연에서 오감으로 체득하는 생생한 지혜와 깨달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봄은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고 했다. 꽃도 기다려도 피고,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피게 마련이다. 하지만 기다림 없이 우연히 마주치는 꽃도 반갑지만 손꼽아 기다린 끝에 만나는 꽃의 기쁨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새해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봄은 멀고, 아직은 겨울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야생화다. 꽃을 볼 수 없어 삭막하기만 한 겨울, 꽃 도감이라도 펼쳐놓고 꽃 이름을 하나씩 외워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리하여 봄 산행에서 꽃을 만났을 때 그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 꽃은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귀한 존재가 되어 그대 가슴에 남지 않을까.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백승훈 기자가 쓴 기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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