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칼레에 이르면 이 도시의 시청광장에서 ‘칼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 조각상을 볼 수 있다. 1347년 영국과 프랑스간 백년전쟁에서 11개월간이나 항거하다 항복한 칼레시민들에게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전쟁배상 및 용서의 조건으로 시민 6명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이 도시의 최고부자인 ‘에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처형을 자처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 귀족 6명이 추가로 처형에 동참하였다. 이후 영국왕비의 건의로 이들의 처형은 면하였으며,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수백년 후인 1888년에 로댕은 칼레에 이 상을 세웠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으로 생각한다.
우리 선인들 중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인물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경주 최부자 일화와 이순신 장군의 멸사봉공 정신, 우암 이회영 형제들의 의열 등이 필자의 뇌리에 생생하다.
경주 최씨 일가는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로 1600년대부터 12대에 걸쳐 300여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누리면서도 주변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이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6가지 가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만석 이상 재산을 늘리지 말 것,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 것,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할 것, 최씨 가문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을 것, 사방 100리 안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벼슬은 진사 이상을 탐하지 말 것). 최씨 가문의 재산은 일제 때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해방후에는 교육사업으로 쓰여졌다. 만석꾼의 부자였으면서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상류층의 도덕적 책임을 다하였다.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는 필자가 세세히 논하지 않더라도 명확한 공사구분 자세, 평소 전쟁에 대비한 준비 및 훈련, 부하와 백성들에 대한 자상함, 냉철한 판단력, 임전무퇴의 용기, 구국의 일념에 따른 자기희생 등 그 분의 지도자로서의 덕성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김용남 한국HR협회 HR칼럼리스트(숭실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