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두막(The Shack, 2016)>은 관객들에게 시간에 대한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에서 교통사고의 시점은 두 개로 나뉜다. 주인공 맥은 오두막에서 신비한 경험을 통해 딸을 잃은 아픔을 치유하고 더 큰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한다. 사람들에게 그 사고는, 맥이 오두막으로 가는 길에 일어났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맥은 오두막에 도착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만이 사람들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셋은 마음 안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다.” 시간에 대한 남다른 사유에 골몰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현재로 인식했다. 물리적 법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흐르는 시간 대신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로 연결된 통일체로서의 시간을 보았고 물리적 법칙에 갇히지 않는 심리적 시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현대인의 몸과 마음은 시간에 붙박여 있다. 물질화 된 시간은 인간의 활동을 억압하고 인간의 정신을 통제한다. 스스로 만든 시간의 체계 안에 갇힌 채 인간은 시간에 끌려 다니며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걱정하고, 미래를 불안해한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소비하지 않기를 조바심치는 동안 자기 자신을 소모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시간에 대한 우리만의 정의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인간의 시간 체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할 수 있다면 과거에 얽매여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일도, 현실의 어려움에 허덕여 그릇된 판단을 하거나 오만함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더 크게 망치는 길로 들어서는 일도, 막연한 미래의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떠느라 현재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일도 막을 수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의 나를 스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향해 모여드는 것이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